▲전기숙 작가의 책 '애쓰며 서 있습니다'와 책을 본 따 만든 성냥갑
윤일희
마음으로는 몇 권의 책을 펴냈을 것이며, 상상으로는 자신만의 책방을 몇 번이라도 짓고 허물었을 그녀이기에, 책방 '공책'을 낸 시기와 책 <애쓰며 서있습니다>를 펴낸 시기가 거의 같다는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꾸준함의 마법'의 힘이 자신에게도 통하는지 도전에 들어간 그녀는, 블로그에 '365 그림책 리뷰'를 시작했다. 말이 쉬어 일 년 365일이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시작할 때는 몰랐겠지만, 인생을 건 일대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림책이었을까. 읽다 수도 없이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게 한 그림책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또는 누구였을까. 그림책을 읽다 보면 한 번쯤 해봤음직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림책의 어느 그림에 또는 서사에 묘한 기시감이 들며, 저기 저곳에 있었던 혹은 내쳐졌던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일말이다.
전기숙 작가는 그림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나와 내가 몰랐던 나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 세상에 벌어지고 있었던 놀랍고도 무서운 사건과 연결되어지는 나를 무수히 접속하게 되었다. 발견 속엔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있었다. 그렇게 발견된 모두가 나이며, 그런 나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그녀가 그림책을 읽는 또는 읽어야만 했던 이유였다.
그녀는 그림책을 읽으며 발견된 자아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자신의 심상에 대한 기억을 '365일 그림책 리뷰'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수백 권을 경유한 수백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많은 기록들에 질서가 필요했고, 수백의 환희, 희열, 아픔, 상처, 성장 등 중에서 고르고 또 고른 이야기가 책 <애쓰며 서있습니다>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꾸준함의 마법'이 정말로 통한 것이다. 그녀의 분화구에서 실로 엄청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다물어진 것이다.
온전히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서 독립출판을 시도한 전기숙 작가에게 홀로 책을 내는 일은 도전인 동시에 발명이었다. 365일간 만난 자신의 감정을 갈피갈피 차곡차곡 채우는 과정에서 고안해낸 "문체의 발명"은 큰 결실이었다. 어떤 일에 자신이 얼마나 슬프고 아픈지를 긴 서술로 풀어내다 문득, "눈물 한 방울 또르르"로 갈음할 수 있어질 때,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무릎이 탁 쳐지며, 고농도 산문시 문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책을 내는 과정도 충만했지만, 책을 낸 이후도 긍정적 변화가 많았다. 완성된 것은 책만이 아니라 전기숙 작가 자체였다. 책을 낸 후 스스로에게 부여한 작가성은 내면의 큰 변화를 견인해냈다. 그 많은 그림책이 그녀의 머릿속에 목록으로 새겨지자, 그림책에 대해 묻는 누구에게든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맞춤 추천까지 자신 있게 해내게 된 것이다.
'공책'을 찾는 손님에게도 유익함을 제공하게 되었으니, 책방지기로서 효능감까지 탑재하게 된 셈이다. 책을 내는 과정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고된 과정을 마치자 그 수확이 선물처럼 안겨졌다. 독립출판만이 독점할 수 있는 장점이라고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책을 좋아하는 일은 좀 과장되게 말해, 가려움을 참을 수 없는 일과 유사하다. 책을 집어 들며, 어떤 세상과 만나게 될까, 저자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두근거리며 책장을 넘겨본 독자는 누구나 알만한 충만한 설레임. 전기숙 작가 역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찾았고, 집에는 없는 책을 볼 수 있는 이모 집을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녀에게 이모 집은 작은 책방이었던 셈이다.
책장에 빈틈없이 채워진 책들은 책을 좋아하는 소녀를 끌어들이기에 더없는 광맥이었을 터, 그 맥을 타고 들어가 마담 퀴리와 헬런 켈러 그리고 빨강머리 앤을 만났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책 속 그녀들은, 전기숙에게 삶을 가꾸는 노력과 담대함 그리고 매 순간 자신을 지키고 사랑하라는 자존감을 끊임없이 속살거려 주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준 결핍은 책들의 주인공들이 준 무한한 위로와 격려로 메워졌다. 즐거움을 준 책방을 '구멍가게'로 재현해내고,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했던 책들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어 책을 만들었다. 잊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증명하고 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두 발바닥과 종아리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서 있"는 당신에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한다. "힘내라고 말하지 않을게요. 그동안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니까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포기하지 않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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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내고, 책방도 열고... 질투를 부른 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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