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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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인 나는 살아오면서 도대체 어떤 종류이건 성폭력이라곤 당해 본 적이 없으니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고문을 당했던 경험으로부터 내 신체가 한갓 사물로 취급되고 내 정신이 타자에 의해 마음대로 능멸당할 때의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 폭행이든 추행이든 희롱이든 여성들이 힘 있는 남성(들)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자기결정권을 침해 당하여 한갓 성적 대상으로 추락했을 때의 그 느낌은 내가 고문을 당하면서 느낀 그 치욕스러운 기분과 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어쩌면 자기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존재이고, 동시에 어쩌면 평소 존경했던 사람이라면, 무력감과 수치심에 더하여 그 사람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 또한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람은 이를 자기 잘못으로 돌리고 한없는 자책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몇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법에 대한 호소를 선택했을 리가 없다. 그 사람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피해자임에도 평생을 마치 죄인처럼 트라우마의 늪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처럼 오랜 고통 끝에 자신이 피해자임을, 자신에겐 잘못이 없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어떤 책임도 묻지 못하고, 어떤 사죄도 받지 못한 채 가해자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로써 그 사람은 영원히 사죄받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인이 하나님에게 잘못을 빌어 속죄를 받았다고 하는 상황에 직면한 엄마의 처지와도 같다. 오히려 그 사람은 가해자를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몰고 간 또 다른 의미의 가해자로 비난받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박원순 전 시장의 선택은 그 사람에게는 어떤 위로도, 어떤 속죄의 행위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가해-피해의 비대칭 관계로부터 가해자인 박 시장만 홀로 빠져나감으로써 그 사람만 영원히 비대칭적 관계의 멍에를 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 사람에게는 박 시장을 성대하게 추모하는 일이나 자신을 거꾸로 가해자라고 비난하는 일만이 아니라,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 자체가 가장 치명적인 폭력으로 느껴질 것이다. 박 전 시장의 선택은 그 사람에게는 가해자 측의 증거인멸 행위이며 동시에 2차 가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한순간에 버린 박 전 시장의 선택은 그의 마지막 '실존의 기투(표준국어대사전: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 편집자 넣음)'로서 섣부른 포폄에 맡길 일은 아니다. '그 사람'의 결단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 두 사람이 겪은 고독과 고통은 자기 한계 내에서 각자에게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두 사람 자신이 아닌 제3자들에게로 향하게 된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애도되고 추모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박 전 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는 그 사람의 사죄 받을 수도, 용서해 줄 수도 없게 된 고통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서 타자인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평생을 반독재운동과 민주적 시민운동에 몸 바쳐왔고, 근 10년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수장으로서 발군의 리더십을 보여 온 박원순 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를 가로막거나 억압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애도와 추모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인 한,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든 방해받거나 비난받을 수 없다. 그리고 박원순 전 시장의 생애 대부분이 '공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애도와 추모가 공적 내용과 형식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박 전 시장에게는 삶의 어두운 그늘 한 편에서 일어난 한갓 '추문'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생애 전체에 걸친 '피해'이고 '고통'이 된 그 사건 역시,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박 전 시장의 죽음 역시, 개인 간의 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특수한 권력관계 속에서 일어난 공적인 사건이라는 사실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버렸지만 여전히 박원순 전 시장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회적 강자이고 그 사람은 이름 없는 약자이다. 우리는 약자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박 전 시장의 일관된 신념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 전 시장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공적으로는 적절한 제한과 삼감을 통과한 애도와 추모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가 박 전 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는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사람의 치유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 전 시장의 장례가 서울시라는 공식 기관의 '기관장'으로 치러지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며, 설사 공적 형식을 갖추더라도 다른 제3의 방법은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고인이 된 박 전 시장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최초의 예의가 될 것이고, 어느 경우라 해도 박 전 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념을 표현한다는 핵심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