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사범 조수 시절 박대영.
이대열
박대영(朴大永). 그는 1919년 예산 광시면 월송리에서 태어났다. 월송리는 영해박씨 집성촌으로 박헌영과 박대영 모두 영해박씨다. 박대영의 아버지 박헌용은 박헌영과 동년배다.
박대영은 '박헌영의 4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문중의 같은 돌림자 항렬일 뿐 사촌은 아니고 먼 종중지간이다. 해방 후로 '전국에서는 박헌영, 충남에서는 박대영'이라는 말이 돌았고, 이 때문에 월송리는 경찰과 우익단체에 찍혀 한국전쟁 전후로 30명 정도가 희생당하는 광시면 최대 비운의 마을이 됐다. (이대열, '해방과 전쟁 속의 광시' 참조, 2008년)
박대영은 일제강점기 진주사범(현 진주교대) 조수로 근무도중 옥고(1941~1943, 서대문형무소)를 치렀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출소 이후에도 일경이 요시찰 인물로 주거 제한을 하는 등 사상범으로 취급을 했다. 이로 미뤄보건대 독립운동 관련 옥고로 보인다.
해방 후 박대영은 건국준비위 예산지부 선전부장과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때문에 그를 여운형 계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미군정은 반공국가를 만든다며 인민위원회 활동을 불법화했다.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해방 직후인 1946년 5월 재판에서 예산에 사는 5명이 인민위원회 관련 활동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들어선 이승만 정부에서 박대영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1949년 체포돼 7년 형을 선고받았다. 6.25 전쟁이 터지고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박대영(당시 30세)은 1950년 7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군경에 의해 불법살해됐다.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1960년 대구매일신문은 당시 박대영이 다른 1401명의 수감자와 함께 대구 근방(가창 계곡 또는 경산코발트광산-기자 주)에서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고 보도했다. 그의 딸 박경옥(83)은 "훗날 대구형무소를 찾아가 아버지 행방을 물으니 '50년 7월 30일, 다른 형무소로 이감갔다'고 했다"며 "이감 날짜가 사망한 날짜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비극은 박대영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박대영의 첫째 동생 박인영은 해방 후 솥공장을 했지만 보도연맹원으로 검속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전쟁이 터지자 인영은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총살됐다. 산내 골령골에서만 대전형무소 정치범과 보도연맹원 등 최대 7000명이 처형됐다.
박대영의 둘째동생 박호영도 광풍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낙오된 인민군과 지방 좌익을 소탕하기 위한 토벌대(경찰과 우익인사로 구성)가 만들어졌다. 이들 토벌대는 박호영을 '노동당 당원'이라며 광시 골짜기로 끌고가 죽였다.
박호영의 가족들은 광시창고에 갇혔고 그 사이 돌보는 사람이 없는 박호영의 두 아들은 동네를 떠돌다 숨졌다. 박대영의 여동생 박사영은 여성동맹원 자격으로 대전으로 교육을 간 일을 문제삼아 처형됐다. 박대영의 형제자매 4명이 모두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대열은 '해방과 전쟁속의 광시면' 제목의 조사보고서(2008년)에서 "월송리는 경찰 토벌대에 의한 토벌과정에서 30여 가구 중 적어도 24명이 박헌영과 같은 영해박씨 종중이 희생됐고, 2명이 자살했다"고 밝혔다. 이어 "월송리 전체로 보면 29명이 전쟁 중에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됐다"며 "인구 대비로 볼때 광시면 내 최대의 피해마을"이라고 덧붙였다.
예산 밖에서도 박헌영의 영향은 뒤따랐다. 충남 예산 출신인 오천식은 서산경찰서 경찰로 근무하던 중 박헌영 추종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초등학교 동문을 검거하지 않고 봐주었다는 동료 경찰의 밀고로 체포됐다. 그는 2년 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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