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상징 팔레는 구(球)라는 뜻으로 메디치 가문을 가리킨다. 이 공 모양의 상징과 메디치(Medici)라는 이름 때문에 이 가문의 조상이 약재상(Medicine)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건 훗날 프랑스 왕비가 된 카트린 데 메디치를 폄하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만든 얘기다.
박기철
당시 시민들이 파치에 동조하지 않았던 이유를 메디치에 대한 존경과 신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승리한 메디치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일 수 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외국보다 우리나라의 자료는 유독 메디치 가문의 좋은 점만을 부각하는 시각이 강한 것 같다.
코시모 때부터 정부 요직에 메디치 사람들을 배치하여 피렌체를 허울뿐인 공화국으로 만든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전통 귀족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반메디치 정서가 꽤 퍼져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처음 두어 시간 동안 메디치파 무장세력이 길거리에 나가서 반란자들을 격퇴하거나 저지하려 한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로렌초와 메디치를 좋아한다는 도시에서 어째서 그랬을까?
- (라우로 마르티네스 지음, <메디치가 살인사건의 재구성>, 김기협 옮김, 푸른역사, 207쪽)
이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당시 치안을 담당하던 공권력, 즉 경찰 병력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등장하는 공권력은 청사 방어를 위한 위병들 뿐이다.
국가 비상사태를 알리는 경보가 울리면 사법 기관을 관장하는 행정장관(Podesta)은 즉시 병력을 이끌고 시뇨리아 광장으로 와야 했다. 하지만 야코포가 위병들의 저항에 막혀 도망칠 때까지 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당시 6개월 임기의 행정장관은 외국인을 임명했다. 가문들 간의 다툼이 극심하던 시절, 어떤 가문과도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사법부를 관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쿠데타가 터졌을 때 행정장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6개월 임기의 외국인이 굳이 사건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원 병력을 기다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위병들이 힘겹게 적을 막아내고 있을 때 행장장관과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대세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파치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누가 승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위에서 인용한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이기는 편이 내 편'이었다. 물론 이런 혼란 속에서 몸을 사리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음모자들이 피렌체인들의 이런 특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몇 시간이 지나서 쿠데타 실패로 대세가 기울자 시민들도 입장을 정하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대 악이 된 파치에 대한 응징을 빌미로 숨겨뒀던 폭력성을 마음껏 내뿜었다. 피의 4월이라 불리는 잔혹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1478년 4월 26일 오후
야코포의 병력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패퇴하자 정부 수반 페트루치는 팔인회를 소집했다. 팔인회는 범죄를 수사하고 처단하는 위원회였다. 문서 보관소에 갇혔던 페루자 출신의 용병들은 모두 살해당해 팔라초 베키오 창밖으로 던져졌고 광장은 피바다가 되었다.
곧이어 자신의 저택에서 허벅지 상처 치료를 위해 발가벗고 있던 프란체스코가 그 모습 그대로 체포되어 끌려왔다. 팔인회는 그와 살비아티 대주교를 비롯한 죄수들을 심문했다. 곧 사형 판결이 났고 즉시 집행되었다.
동쪽 성벽 밖에 공식적인 처형장이 있었지만, 죄수들은 목에 밧줄이 감겨 시청사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프란체스코는 발가벗겨진 채였고 살비아티는 매달린 채 한참 동안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다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