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이제랑 일어납서> 중에서 양용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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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이전에 누군가의 삶의 터전인 제주
1991년 당시는 동구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협정 등 블록화로 세계사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루과이라운드(UR)❶ 농업협정은 한국 농민들에게 많은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양용찬은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의 농민사랑모임 대표를 맡으며 2년 동안을 제주의 농업과 지역 문제를 알리는 데 헌신했다.
스무 명이 넘는 젊은이들의 희생이 이어졌어도 변하는 것이 없던 1991년의 현실 속에서, 양용찬은 농협 연쇄점에서 수입 오렌지로 짠 주스를 보고는 판매 중지를 요구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돌렸다. 이렇게 작은 배신감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일들은 사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양용찬은 그런 일을 마주칠 때마다, 자신과 농민들을 지킬 사람들은 자신밖에 없다는 절박함과 위기감에 닿았을 것이다.
같은 해 11월 7일 저녁, 일을 마치고 작업복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 청년회 사무실로 들어온 그는 사무실에 있던 회원들에게 목욕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 후 그가 선 곳은 청년회 건물 옥상이었다. 그는 유서를 남긴 채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투신했다, 지나가던 사람의 신고로 서귀포 의료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8시 30분경 숨을 거뒀다.
"(…)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의 제주도를 원하기에 특별법 저지, 2차 종합개발계획 폐기를 외치며 또한 이를 추진하는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이 길을 간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삶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작별 인사도 담겨있었다. 그의 희생 이후 법 제정 반대 여론은 더욱 드세게 번져나갔지만, 제주도개발특별법은 그해 말 민자당 의원들의 단독 상정으로 통과되었다.
제주는 지금도 여전히 과잉개발과 과잉관광에 몸살을 겪고 있다. 강정 군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해군기지가 세워지고, 제주 신공항 건설 문제로 지역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는 사이 쌓여가는 쓰레기와 관광객들에게 맞춰 치솟은 물가는 아름답고 자비로운 섬 하나가 받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시험하는 중이다. 제주 송악산에는 고층 호텔이, 선흘리 주변에는 테마파크가 들어서는 등 관광과 개발 계획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고,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고, 비자림로의 삼나무가 쓰러질 때마다 그의 이름이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