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전 왕의 권력을 짐작케 하는 이란의 고대 유적 페르세폴리스.
홍성식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고 잘라 말했다. 토를 달 것도 없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자석의 N극과 S극, 혹은 물과 기름처럼 극단의 두 가지를 섞은 것이 아니다. 같은 밀도의 액체를 섞어놓은 혼합주스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는 인간 중 99%는 애써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
민족과 인종, 종교와 경제 문제로 야기된 전쟁은 그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 않은 인간을 먼저 죽음으로 내몬다. 세계 1·2차대전이 그랬고, 한국전쟁이 그랬으며, 아프리카와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내전이 그랬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광기 어린 한 인종주의자의 일그러진 욕망은 유대인 수백 만 명의 죽음과 수난으로 현대사에 기록됐다.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선 70년 전 한국인들은 어제까지 형, 동생으로 부르던 서로의 가슴에 총을 쏘아댔다.
이슬람과 가톨릭, 기독교와 정교회로 각기 다른 신을 섬기던 이들 역시 "망할 이교도"라고 상대방을 힐난하며 이웃의 팔다리를 잘랐다. 함께 저녁을 먹던 식탁으로 핏물이 튀었다.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고 간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세상 어디에도 끔찍하고 해괴한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쟁에서 사용되는 총탄에 눈이 달리지 않았듯, 바이러스 또한 사람을 가려 습격하지 않는다.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패륜을 거듭하던 천하의 악당도, 어린아이도, 팔순의 노인도 갑작스레 닥쳐오는 전쟁과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의 음습한 그림자를 피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