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목도 공립 심상소학교 학생들이 체조 시간에 목검으로 검도 체조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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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식민의 논리'는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상반된 형태로 드러난다.
한일강제병합 직후에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체조나 무도 등 체육 교육이 중시되지 않았다. 조선인 학생들이 신체를 단련하면 역으로 일제에 저항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일제는 내지인(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에게 차별적으로 체육 교육을 실시했다. 일본인 학생들의 경우 체육 교육을 통해 육체의 발달을 꾀했다면,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절제와 순종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면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을 언제든 전선에 내보낼 수 있는 '예비 군사자원'으로 규정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정신적으로는 국체론(國體論: 천황이 곧 국가라는 전체주의적 사상)을 주입하면서, 육체적으로는 각종 체조·무도·교련 교육을 통해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저자는 "1937년 이후의 교과서 내용은 조선인 학생들을 철저하게 '미래의 병사'로 거듭나게 하려는 정신적 세뇌와 육체적 훈련으로 변화되었다"며 그 예로 조선총독부가 고안한 '황국신민체조(皇國臣民體操)'를 든다.
"고래(古來)로부터 무도(武道)의 형태를 모범으로 삼아 이를 체조화(體操化)하고 이것을 모든 조직에서 황국신민체조(皇國臣民體操)로 도입하고 일반에게 보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예로부터 일본(日本)의 정신적 근대(根帶)가 무도에 의하여 배양된 무사도(武士道) 정신에 있음을 믿고, 그 정신을 받아들여 검(劍)을 사용하는 자와 사용하지 않는 자를 불문하고, 일상 무도의 형태로 친해지게 하여 심신(心身)을 단련함과 동시 황국신민(皇國臣民)다운 신념체득(信念體得)의 자질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 178쪽, <황국신민체조취의서(皇國臣民體操趣意書)> 中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각 학교와 일반에 이 체조를 널리 보급했다. 이제 조선인은 황국신민서사와 황국신민체조를 통해 일제에 충성하는 정신과 신체를 가진 황국신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건전한 모체 양성' 여성들도 예외일 수 없어
식민의 논리는 여성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제의 어용기구였던 '조선체육진흥회'가 1942년 3월에 제정한 '일반 국민체육 지도요강'을 살펴보면 '특히 여자들은 건전한 모체(母體)를 기르도록 하고'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또한 학교에서도 여학생 체육 교육의 목표로 '덕성 및 정조의 함양'을 제시했다.
이는 여성들에게 미래의 군사자원인 아들들을 낳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여성들에게 '육상경기', '집단훈련', '무도전장(戰場)운동' 등 군사체육을 장려했다.
일제의 군사체육 강화에 따라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교내에 복도를 이동하거나 등하교를 할 때, 제식동작에 발걸음을 맞춰 움직여야 했다. 또 <국어독본(國語讀本)>과 같은 교과서에서 행군이나 전투하는 장면들을 삽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미래의 충성스러운 황군으로 조선 학생들을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무예 연구가인 저자는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무술이 어떤 식으로 변용되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학생들에게도 무도(武道)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무술의 끝에 '도(道)'가 붙게 된 것은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신도(神道)·황도(皇道)·무사도 등을 강조하면서 도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실시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검술(劍術)은 검도(劍道)로, 유술(柔術)은 유도(柔道)로 변화·정립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무도 교육은 국가 곧 천황에 대한 충성을 조선인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오무도(五武道)라 하여 전투에 실제로 활용 가능한 기술인 '유도·검도·궁도(활쏘기)·총검도(총검술)·사격도(사격)' 등 다섯 가지의 무도를 학교에서 훈련시킴으로써 군국주의와 신도(神道)에 근거한 무도 정신을 함양케 하고자 했다. 특히나 검도의 경우 기관총알이 난무하는 적진에 과감하게 돌격하는 황군정신의 주입을 위해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개인의 유희나 취미로서의 체육이 아니라 유사시에 국가를 위해 가용할 수 있는 군사자원화를 전제로 한 체육 활동을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 궁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한편 일제강점기 당시 '전통무예 탄압설'에 대해 저자는 흥미로운 사례를 들어 반박한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전통무예인 택견이나 궁술(활쏘기)이 탄압받았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정설처럼 퍼져있다. 일제의 억압으로 우리 무예의 맥(脈)이 끊김에 따라, 전통무예는 실전(失傳)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전통무예를 일제가 직접적으로 탄압했다는 구체적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단언한다.
그 근거로 조선의 무예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궁술의 경우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 전통 방식의 활쏘기가 공식적으로 행해졌던 사실을 제시한다. 한일강제병합 이후로도 전국 각지에 설치된 사정(射亭:활터)에서 활을 쏘는 풍습이 이어졌다는 것.
전국적으로 거의 매달 궁술대회가 열렸으며, 심지어 궁술이 체계적으로 정립된 시기 역시 다름 아닌 일제강점기였다. 우리의 전통 궁술을 보전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궁술연구회'에서는 1929년에 <조선의 궁술(朝鮮의 弓術)>이라는 책자를 펴냈는데, 이 책자 덕분에 지금까지도 전통 궁술의 형태가 전해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