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정거장의 개통 당시 모습.
서울특별시
1899년 노량진에서 경인선의 제물포 구간이 개통됐다. 그 이후, 1900년 7월 8일을 기해 한강철교가 개통하며 용산역과 남대문역, 그리고 경성정거장이 개업하게 되었다. 지금의 서울역 자리에는 중간역이었던 남대문역이 있었고, 그 곳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를 위로 올라오면 나오는 순화동에 경성정거장이 있었다.
지금의 이화외고, 농협중앙회 일대, 그리고 경찰청 앞에 이르기까지가 경성정거장이 차지하고 있는 너른 위치였다. 반대로 당시의 남대문역은 10평짜리 목조 건물 간이역이었고, 도리어 용산역보다도 규모가 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돈의문과도 100m 정도로 가깝고, 종로와도 가까운 경성정거장에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인선의 개통식 역시 1900년 11월 경성정거장에서 치러졌다. 당시에도 일제의 자본이 상당수 투입되었기에 개통식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휘날렸다는 문헌이 존재한다. 개통식에는 철도원의 총재였던 민병석, 미국·일본공사, 외부대신 등이 참석해 요즈음 못지 않은 성대한 개통식이 치뤄졌단다.
경인선 개통 전에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인천에 도착하면 하루를 무조건 쉬어야 했다. 짐을 역꾼에게 맡기고 마차를 타고 가는 데 적어도 한나절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인선이 서울 안까지 개통되자 배를 타고 인천에 내린 외국인이 바로 서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개항 이후 20년 넘게 개화기의 상징이었던 인천의 쇠락이 시작된 것이다.
경성정거장은 대한제국기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정동과 서대문 일대의 상징이 되었다. 황제가 살던 덕수궁이 있었으며, 경성정거장 앞에는 '스테이션 호텔'처럼 근대식 호텔도 들어섰다. 권력자들의 집 역시 정동에 자리했고, 여러 국가의 공사관 역시 정동과 서대문 일대에 속속 들어섰다. 그렇게 개화의 현장이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까워졌다.
조선 사람은 서대문역, 일본인은 남대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