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의 성산 아래에 있는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 식영정에 걸려있는 제봉 선생의 ‘식영정 20영’ 이 시는 송강 정철의 명작, ‘성산별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임영열
수석 합격한 덕에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던 제봉은 31세 홍문관 교리 시절 정쟁에 연루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제봉은 시문에 몰두하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명문을 남긴다.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함께 '식영정 4선(四仙)'으로 불리며 '식영정 이십영'를 지었다. 이 시문을 모티브로 하여 정철의 명작, '성산별곡'이 탄생한다. 42세 때 광주 목사 임훈과 함께 4박 5일 동안 무등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 '유서석록'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년간 고향에서의 은거를 마치고 50세 때 재 등용되어 영암, 서산, 순창 군수를 지내다 1591년 동래부사, 지금의 '부산광역시장'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한다. 고향에 내려온 지 1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국가의 녹을 받던 제봉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60세 백발의 제봉은 박광옥, 유팽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며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한 달여만에 담양의 추성관에는 전라도 각지에서 6천 여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제봉은 '전라도연합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1592년 6월 11일, 제봉의 연합의병은 유팽로와 안영,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두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담양을 출발한다. 전주를 거쳐 은진에 도착했을 때 금산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이 호남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곡창 지대인 호남을 방어하기 위해 연합의병은 관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이 먼저 무너졌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후퇴 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장군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유팽로와 안영, 차남 인후와 함께 장렬히 순국했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곡창 호남을 사수했고, 장군의 죽음은 호남 의병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주인을 닮은 충노(忠奴) '봉이'와 '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