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당시 육군첩보부대 SC지대 무장공작원으로 종군했던 김정의 용사의 종군 기장 수여증. 소속은 육군 제4863부대, 계급은 군속으로 나와 있다.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대원들은 경기도 파주와 서울 사직공원 등에서 약 10주 동안 기초 군사훈련과 정보교육을 받은 후 12명이 1개 조로 국군의 전방 부대에 분산 배속됐다. 이들은 도보로 황해도 연백·해주·철원·김화 등지에, 해상으로는 함흥에 침투했다. 수송기를 타고 평안남도 성천·순천 지역에 낙하해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적지 한복판에서 첩보활동을 벌여야 하는 임무 특성상 대원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침투나 퇴출 과정에서 발각돼 전사하거나,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특히 공중을 통해 투입됐던 장거리 공작조는 무사 귀환한 사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상률이 높았다. 이들 화교 첩보부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획득한 귀중한 정보는 한국군의 작전수립에 요긴하게 쓰였다.
휴전 직전까지 첩보활동을 벌였던 SC지대의 마지막 작전은 1953년 7월 '퇴조 해상침투작전'이었다. 화교 대원 30명과 한국인 통신병 10명이 2개조로 나누어져 한 조는 함경남도 갑산 지역에, 다른 한 조는 백두산 일대로 침투했다. 초반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됐지만, 침투 6일째 되던 날 적에게 발각됐다. 북한군 1개 중대에게 겹겹이 포위된 상황에서 대원들은 3시간 남짓 용감하게 싸웠지만,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고 말았다.
생존자들은 통신기와 주요장비를 모두 파괴한 후 무작정 남쪽을 향해 탈출했다. 악전고투 끝에 이들이 강원도 속초의 육군첩보대 제36지구대로 복귀했던 날은 7월 25일, 휴전협정 이틀 전이었다. 귀환자는 화교 대원 3명과 한국인 대원 2명이 전부였다.
휴전 직후 SC지대는 해산되었지만, 일부 대원은 첩보부대에 잔류해 중공군에 대한 정찰활동을 수행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SC지대 무장공작원 70명 중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한국전쟁 당시 1사단 중국인특별수색대와 SC지대 외에도 미 극동군사령부 직할 공작·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주한첩보연락처)에도 소수의 화교들이 복무했다. 이 외에 통역과 심리전, 선무 공작, 포로 심문 등에도 상당수의 재한 화교들이 참여했다.
중국인특별수색대장 위서방 용사는 전쟁이 끝난 뒤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가 됐다. 1961년부터 30여 년동안 강원도 강릉에서 '장생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극빈자를 돌보고 장학사업에도 앞장서다 198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2월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3월 20일 국립 서울현충원 제12묘역에 안장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중 '대한민국에 공로가 현저한 외국인 사망자 중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의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하는 자는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는 당시 조항이 안장 근거가 됐다.
2012년 5월 15일에는 24묘역에 안장돼 있던 강혜림 용사의 유해를 위서방 용사의 묘소 옆으로 이장해 두 사람을 나란히 모셨다. 재한 화교사회는 매년 이날 현충원을 찾아 기념식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한 이유
한국전에 참전했던 화교들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현충원에 안장된 위서방·강혜림 용사를 제외하고는 참전에 걸맞은 예우를 받지 못했다.
1971년 12월 53명이 종군기장을, 1973년 9월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외국인(중화민국 국적자)이라는 이유로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참전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국가보훈처의 일관된 입장이다. 보훈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에 전쟁당시 입었던 부상도 자비로 치료해야 했다.
국립묘지 안장을 원했던 화교 참전용사들은 한국인으로 귀화한 후에야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의 아버지 김성정(金聖亭, 2001년 별세) 용사는 1998년 3월 한국국적을 취득한 이듬해 '참전용사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 2015년 10월 세상을 떠난 오중현(吳中賢) 용사는 한국전 당시 SC지대에서 활약하면서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귀화하지 않는 이상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평생 유지해왔던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화교 참전용사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 확인되는 생존자는 경남 울산의 강춘덕(姜春德·94)씨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는 이수해(李樹海·88)씨 정도다. 고령에도 비교적 건강하던 강씨는 5개월 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다.
강춘덕씨의 딸 계영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버님이 참전용사로서 보훈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올해 초 보훈처에 문의를 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공식적 예우를 꺼리는 정부... "거창한 추모비 바라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