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없이 채워진 냉장고김치냉장고가 없어 냉장고에 김치통 3개가 들어가 여유가 없는 냉장고 내부입니다.
장순심
고장 난 첫날, 더는 쓸 수 없는 김치냉장고 안과 밖을 깨끗이 청소했다. 3일 째부터 김치냉장고 위로 자잘한 물건들이 놓였다. 문을 안 열어도 되니 이리저리 치워야 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반통도 안 남은 김치가 있을 뿐이니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불편함이 안 느껴졌다. 평소에도 과일이나 채소는 조금씩 사 오는 편이고, 찬거리나 고기를 냉장고에 쌓아 두는 집도 아니었다.
'어라! 이대로면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이상이 없잖아! 이건 계획에 없는 건데...'
가족들 말대로 냉장고 없이 사는 실험적인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5일이 지났어도 김치냉장고 없는 일상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6일째,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로 인해 김치 담그는 열혈 주부가 된 뒤로 김치를 할 때마다 조금씩 양을 늘려 제법 많은 양의 김치에 도전했었다. 그간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냉장고 사정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도매시장까지 가서 김치거리를 잔뜩 사는 순간에도, 옆에 청과물 도매시장에서 과일을 욕심껏 살 때에도 냉장고 사정은 생각하지 않았다.
천 원에 두 단, 실감 안 되는 가격에 덮어놓고 많이 산 열무와 한동안 가족들이 잘 먹은 알타리를 그야말로 넉넉히 샀다. 많이 사도 가격은 소매 가격에도 미치지 않았다. 담그고 나니 김치냉장고에 들어가는 김치통으로 3통이 만들어졌다.
익을 때까지 밖에 둔 김치는 날이 더우니 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익은 냄새를 솔솔 풍겼다. 김치냉장고에 들어갈 타이밍이었다. 애초에 김장까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장 담근 김치 넣을 곳을 걱정해야 했던 거였다.
과일은 야채칸을 모두 차지했고, 김치통 세 개가 나란히 그 위에 칸에 차곡차곡 쌓였다. 마음은 뿌듯한데 갑자기 답답해졌다. 뭘 더 살 것도 아니지만, 뭘 더 사도 넣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드디어 김치냉장고를 사야한다는 당위로 다가왔다.
이쯤 되니 김치냉장고 없이 사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김치를 넣고 보니 그날그날의 식재료, 찌개나 무침을 만들 채소와 양념 정도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어 있을 때는 크다고 생각했지만 채워지니 턱없이 좁고 작게 느껴졌다. 가족 모두가 집콕인 상황에서 삼식이 가족을 거느린 주부에게 부엌에서의 피로감을 덜어주려면, 일주일 정도의 부식은 냉장고에 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일이 지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크기 때문에 사오지 못한 수박을 아직도 못 먹고 있다. 수박 한 통을 금세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김치냉장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슬슬 가족들 입에서도 냉장고에 넣을 데가 없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니 고장나기 전까지 김치냉장고를 19년 사용했다. 남들에 비해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10년 정도인 전자제품 평균 수명에 비해서는 잘 사용했던 것 같다. 김치냉장고 없이 산 8일. 그가 준 많은 편리함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 드는 건 몰라도 나는 건 표가 난다더니 물건도 그랬다. 김치냉장고가 있을 땐 몰랐지만 막상 없으니 아쉬운 구석이 많았다. 그래도 살림을 꾸준히 하다보니 무조건 대형만을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김치냉장고를 산다면, 지금 사용하던 120L 용량이나 그보다 한 사이즈 큰 정도면 우리 가족에겐 충분할 것 같다.
김치냉장고에서 버려지거나 썩어나가는 것 없이 알뜰하게 잘 사용할 수 있는 거면 될 것 같다. 김치냉장고 없이 산 8일, 제철 과일과 시원한 음료도 그립지만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썰어 놓은 시원한 수박이 제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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