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2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와 소년병전우회가 국방부 등을 찾아다니며 정리한 소년병 명부.
구영식
흥미롭게도 소년병과 관련해 이명박 정부 시기에 가장 전향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정권 실세였던 이재오 당시 국민권익위원장과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대구에 소재한 소년병전우회 사무실을 직접 방문했다. 국방부는 병적기록표에 '6.25 참전 소년·소녀지원병'이라고 명기하고, "당시 15세 아동을 현역병으로 입대시킨 관련 법령이나 근거는 확인할 수 없다"라고 밝힘으로써 소년병의 실체와 징집의 불법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특히 지난 2011년 12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에서는 <6.25전쟁 소년병 연구>(이상호·박영실, 아래 <소년병 연구>)를 펴냈다. 그동안 한국전쟁사에서 완전히 배제됐던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소년병의 범위를 정의하고, 참전 규모와 입대과정, 전투 참전, 전쟁 이후 삶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다.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소년병은 '정식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으로 참전한 17세 이하 군인'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병의 규모는 2만9603명에 이른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3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다. 국방부(1만4400여 명)나 국가보훈처(2만8694명)에서 추정했던 규모보다 더 많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2만9603명 가운데 2573명이 전사했다. 1950년과 1951년, 특히 낙동강방어선전투와 중공군 참전 이후에 소년병의 희생이 집중됐다.
전사자를 제외한 소년병 가운데 2만4263명은 국군 소속, 2765명은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특히 국군에 배속됐던 소년병 2만4263명 가운데 467명이 '소녀병'(여군)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국방부가 주장해왔던 '23명'보다 20배나 많은 규모다.
소년병은 학교 배속장교의 권유, 학교의 소집, 국민방위군 소집령에 의한 입대, 경찰의 불심검문에 의한 입대, 자원입대, 가두 징병모집 등을 통해 입대했다. <소년병 연구>는 "당시 전세의 악화로 인해 입대가 정상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임시방편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사례가 많다"라고 밝혔다. 소년병 징집 과정이 대부분 불법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백선엽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