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복동> 스틸 사진
뉴스타파
영화 <김복동>은 영화 제목 그대로, 사람 김복동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책이나 영상 속에 나오는 위안부 피해자의 상상물이 아닌 정말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 김복동. 그 김복동은 본인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리고 본인이 없을 미래 또한 바꾸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인권활동가'다.
온몸이 아파도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매주 수요집회를 참석하고, 위안부 운동의 영역을 한국과 일본의 대결 구도 이상으로 확장해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게 활동하기 위해 김복동 활동가가 보여줘야 하는 모습과 말은 오로지 피해자 김복동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김복동 활동가는 여러 자리에서 본인을 소개하는데, 그 소개는 항상 '서울에서 온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이다. 김복동이 자신을 그렇게만 소개해야 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증언을 들었을 때야 문제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식은 대개 적극적인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김복동이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과 상처가 함께 이해되는 대신, 김복동의 피해 서사는 역사 교과서 속 '위안부 피해'라는 사건의 한 요소가 되어 소비됐다.
사람들은 위안부 피해라는 사건을 인식하면 분노하지만, 그 분노의 책임을 우리가 함께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이야기해야지만 드러나는 부정의도 문제지만, 그 부정의가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우리는 그 문제들에서 우리의 책임을 지우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를 문제의 당사자로 놓는 대신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착취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착취'다. 우리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착취해 우리가 생각하는 피해자상에 그들을 가둬놨다. 불쌍한 사람, 그렇기 때문에 한일전의 표상이 되는 존재, 혹은 그렇게 호명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존재. 그 호명들 속에서 정작 위안부 피해자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우리가 상상하는 형상만 남는다.
나는 그 가장 단적인 예가 소녀상에 대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소녀였던 시간'은 말 그대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빼앗긴 상실이자 피해다. 그 상실을 재현해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의미 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하는 목격자로서의 피해자 재현은 상실과 피해의 시간을 뒤집어 피해자를 문제의 해결사로 호명한다. 동시에 동상의 존재는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또한 부정의의 목격자이자 책임자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소녀상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소녀상을 순결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그 상징성이 가지는 배제를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해석은 정작 한국 사회 내에서 어떻게 위안부 운동이 여러 편견과 경합하면서 성장해왔는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배제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어떤 상상물이 아닌 실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식하고 나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소녀상의 존재가 어떤 의미일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건이 아닌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피해자를 타자화하고 어떤 추상화된 존재로 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비극과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연대하는 힘은 그곳에서부터 나온다.
전시 성폭력-일본군 위안부, 부정의를 목격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