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파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북한이 지난 16일 오후 2시 50분경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연락사무소 뒤쪽 15층짜리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외벽 유리창이 폭파 충격으로 부서지고 있다.
연합뉴스
6월 9일 남북 통신선을 차단한 북한은 6.15 공동선언 20주년 다음날인 6월 16일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물인 연락사무소를 일거에 폭파했다. 또 북한은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시설에 대한 재무장 의지도 천명했다. 16일 인민군 총참모부는 "북남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대들에 군대가 다시 진출하여 전선을 요새화하며 대남 군사적 경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행동 방안을 연구할 데 대한 의견을 접수했다"고 공개 천명했다.
풍계리 핵시설 폭파는 관계가 좋을 때 일어난 일이고, 연락사무소 폭파는 관계가 안 좋을 때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두 유형의 행위에 담긴 공통점은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하고 상대의 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기존 구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판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김정은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부득이하게 양보를 해야 할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김정은의 의지가 두 유형에 공통적으로 묻어 있다.
이번 6월 들어 북한이 말과 행동을 통해 표명하는 메시지는 비교적 선명하다. 9일의 통신선 차단, 12일의 리선권 외무상 및 장금철 통일전선부장의 담화, 13일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및 권정근 외무성 국장의 담화에 이어 16일의 연락사무소 폭파를 일관하는 공통 메시지는, 최근 2년간의 남북관계 진척 상황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새로운 남북관계 판짜기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메시지를 상당히 '파괴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의 파괴 이미지는 대외관계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나타났다. 집권 초반의 숙청 과정에서도 그랬다. 2018년에 <전략연구> 제25권 제2호에 실린 이동찬 국방부 전비태세검열단 검열관의 논문 "김정은 성향과 정책결정 방향성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정일 사후 북한군 최고의 실세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리영호는 민간 사업권의 당 이전에 반대하다 2012년 7월에 전격 숙청되었고, 이어서 2013년 12월에는 장성택이 반당·반혁명 혐의로 고사포로 총살되었다. 2015년 4월에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수령영도 거부와 군벌 관료주의라는 죄명으로 처형하였다."
"김정은 시대에 고위 간부의 처형 횟수는 2012년 17명, 2013년 10명, 2014년 41명, 2015년 60여 명으로 급증하였는데, 2014년에는 장성택 관련 측근들의 인사가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보이며, 2015년부터는 간부들의 기강 확립을 위해 공개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김정은은 정반대 이미지도 종종 보여준다. 대중 친화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2012년 6월호 <중앙시사매거진>에 실린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기고문 "[정밀분석] 김정은 북한체제 150일: 김일성 본뜬 격세유전 리더십 무엇을 노리나"에 이런 사례들이 소개됐다.
"김정은은 올 초 군부대를 시찰하면서 리영호 군 총참모장과 김정각 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등 군부 실세들에게 단호한 태도로 지시를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반면, 부대 장병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을 때에는 자신의 양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지휘관들을 다독이며 손을 꽉 잡아주거나 정면을 주시하며 박수만 열심히 치고 있는 병사의 손을 잡아끌어 팔짱을 끼기도 했다.
권위주의적이고 대중과의 관계에서 거의 항상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김정일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김정은은 더 나아가 군부대를 시찰하면서 병사들의 숙소와 음식까지 면밀하게 살폈다."
김정일의 상반된 모습들은, 이따금 선보이는 파괴 행위에 그의 의식이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가 의식적으로 그런 행위를 통제하고 있다는 판단을 도출하게 한다. 이번 연락사무소 파괴도 그런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6월 15일 아닌 16일의 의미... 막무가내는 아니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수보회의)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무거운 마음으로 맞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뒤 "그러나 남북이 함께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합니다"라면서 "오랜 단절과 전쟁의 위기까지 어렵게 넘어선 지금의 남북관계를 또다시 멈춰서는 안 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문 대통령이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에 남북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북한은 그의 발언을 들은 다음날, 남북관계 정상화의 상징물을 파괴했다.
연락사무소 폭파의 상징성을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했다면, 6월 16일이 아닌 6월 15일에 폭파를 실행했어야 한다. 하지만 김정은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다음날 행동했다. 이는 문재인 발언에 대한 화답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관계 회복의 길을 조금이나마 열어두기 위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연락사무소를 6월 15일에 폭파했다면 남한에 대해 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불효자'가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남북관계 성과를 이룩한 날의 20주년에 폭파를 실행했다면, 그는 아버지의 성과를 뒤집는 아들이 된다. 15일에 하지 않고 16일에 했다는 것은 그의 파괴 이미지가 그 자신에 의해 관리되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이 파괴 이미지를 상당 정도로 통제하고 있다는 점은, 상대방이 도발적 행동을 했을 때 그가 보여준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상대방이 예상 외로 세게 나올 때는 정면으로 응수하기보다는 '타임'을 걸며 상황 전개를 멈추게 하려는 모습이 그에게서 나온 일이 있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에 비무장지대(DMZ)를 순찰하던 육군 1사단 하사 2명이 목함 지뢰의 폭발로 인해 부상을 입었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사과를 요구하면서 대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남한은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대북 확성기 선전전을 재개했다. 국제사회에서도 대북 비난이 고조됐다.
상대방이 일으킨 이 같은 뜻밖의 긴장 고조에 대해 김정은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조치를 선택했다.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를 통해 유감을 표명하고 상황을 봉합한 것이다. 파괴 이미지를 앞세워 상대의 기를 꺾고 판세를 주도하는 데 익숙한 김정은으로서는 상대방이 주도권을 갖고 있을 때는 '게임 오버'를 외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번 파괴에 담긴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