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경기도 권미남
김재기씨는 노동법률상담소에서 근무한 이후 수원에서 25년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을 한 뒤, 지난해부터 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지난 5일 진행한 김재기씨와 인터뷰 일문일답 중 후반부다.
- 1989년부터 이재명 변호사와 광주·이천·여주 노동자·농민들을 위한 노동법률상담소를 3년간 운영했다.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우선 약 10여 개 기업에서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분들을 발굴했다. 소모임을 만들어서 매주 어떤 것이 문제이고, 앞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노조활동은 어떻게 더 활성화할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를 했다. 그러다 보니 노조가 해야 할 역할, 노동자 권익을 위해 회사에 요구해야 할 것들이 정리됐다.
문화적인 활동도 했다. 이재명 변호사는 노동조합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문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풍물패를 만들어 공연도 하고, 그 안에서 활동가로 성장하게 했다. 그때 했던 사람들이 지금도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노래패를 모집해서 노동가요도 배우고, 전국 노동자 가요제에 나가서 입상도 했다. 또, 한 화장품 회사 노동자를 중심으로 연극반이 만들어졌다. 노동자들이 연극이라는 것을 통해서 문화 활동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각박해져 있는 심신이 노래와 연극을 통해서 부드러워지면서 단합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 노동법률상담소에서 왜 노조 문화 활동을 조직한 것인가?
"우리는 형식적으로 법률상담소였지만, 노동자들의 의식을 높이고 조직화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정의로운 활동을 하게끔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때 사용자 측에서는 그걸 두고 '의식화 사업'이라고 매도를 했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영화감상반이다. 당시 광주·이천·여주 지역 노동자, 시민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오직 '폭도들이나 빨갱이가 배후 조종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영화반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상영했던 것이 (1980년 5월 전남) 광주도청 앞에서 벌어진 학살 장면을 독일의 한 목사가 촬영한 영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걸 상영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렸던 시절이다. 저녁에 한 노동자 지하방에 모여서 창문도 가리고 2시간짜리 기록물을 같이 봤다. 탱크가 (광주)시민들을 밟고 지나가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장이 그대로 찍힌 영상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노동자들이 그것을 보고 잘못 알았다는 것을 크게 느끼는 계기가 됐고, 그 해부터는 방문단을 만들어서 매년 (광주광역시) 망월동 5.18 민주묘역을 참배했다. 그런 활동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위험할 수 있는데, 이재명 변호사한테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해서 크게 힘을 얻었다."
이재명 변호사가 부른 '잘린 손가락'... 민주노조 건설 운동 확대
- 돈이 없어서 법에 호소할 수 없었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도 많이 하지 않았나.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생활 법률까지도 상담했다. 돈 떼인 사람, 집에서 가정폭력을 당한 사람, 옛날 조상 땅을 찾겠다는 사람 등이 줄을 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1차 상담은 우리 간사들이 하고, 꼭 이재명 변호사 면담이 필요한 사람은 이 변호사가 오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하는 것으로 했다. 6개월 정도 지나서 보니까 그렇게 상담한 사례가 100장씩 쓸 수 있는 상담일지 3권이나 되더라. 엄청난 숫자였다. 당시 광주·이천·여주에는 법원도 없고, 변호사 사무실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 당시 이재명 변호사는 왜 그렇게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까?
"어느 날 갑자기 사법고시 합격해서 왔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무조건 다 믿을 수 없었다. (성남에서 이천까지) 버스 타고 다니면서 돈도 안 되는데, 오히려 돈을 퍼붓는데, 바보같이 왜 저렇게 하나, 싶었다. 어쨌든 처음 3~4개월 활동하다 보니 (상담소를 찾아오는) 노동자·농민 수가 늘어났다. 어느 날 이재명 변호사가 그 사람들과 1박 2일을 같이 지낼 수 있도록 시간을 정해달라고 하더라. 그게 지금은 워크숍이라고 하지만 그땐 그런 용어도 몰랐다. 그렇게 한 20명 정도 모였는데, 이 변호사가 그날 모임을 직접 리드했다.
'우리가 더 친해지고 믿기 위해서는 서로 뭔가 통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본인이 먼저 얘기를 하는데, 그때 굉장히 감동했다. 저도 아버지가 8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무장사로서 먹고 살았기 때문에 누이 3명을 포함해서 초등학교 근처도 못 가봤다. 그게 창피해서 그때까지 누구한테 얘기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재명 변호사도 자기는 학교 문턱도 못 가봤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가서 일을 하다 보니 중학교 나온 형은 시급을 10~20원 더 주더라, 그래서 그걸 더 받으려고 자기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고, 또 중학교를 졸업해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형은 몇십 원을 더 주더라….
그런 얘기가 굉장히 쇼킹했다. (변호사라더니) 초등학교만 나온 게 전부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호사가 공장에서 매 맞던 얘기 등을 더 하더니, '나머지는 제가 노래 하나 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면서 생뚱맞게 정말 노래를 부르는 거다. 숙연하게 일어나더니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던 밤, 덜컥덜컥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그러더니 '저는 공장에서 이미 이렇게 됐습니다. 손등은 미싱(재봉틀)이 반복해서 찍는데도 모르고 (구멍이 났고), 프레스에 눌려서 (한쪽 팔은) 바보가 됐습니다', 하면서 자신의 팔을 보여줬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울음바다가 됐다. 그다음부터 노동자들의 사연이 다 터져 나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