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앞에 선 김재규의 마지막 모습. 재판 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그는 짧게"없다"고 답했다. 1979년 12월 20일에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이듬해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경향신문
운명의 날 1980년 5월 24일의 여명이 채 밝기 전인 새벽 3시경, 김재규를 태운 호송차량이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서대문구 영천의 서울구치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보안청사의 지하실 독방에 가뒀다.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지금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이 서대문형무소였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의병과 항일지사가 생명을 잃거나 고초를 겪었다. 의병장 이인영을 필두로 김구ㆍ안창호ㆍ여운형 등 독립지사, 손병희ㆍ한용운 등 민족대표들, 강우규 의사, 유관순 등 3ㆍ1혁명 관련자 수천 명, 해방 뒤에는 진보당 조봉암, 북한 노동당부부장 황태성, 인혁당사건 관련자 등이 여기서 처형 되었다. 민족의 수난과 한이 맺힌 곳이다. (주석 5)
우연이었을까, 현저동 101번지에 잠시 수감된 김재규의 수형번호가 101번이었다. 이곳으로 신새벽에 이감될 때 그는 곧 형이 집행될 것을 예감하였다. 그리고 담담한 심경으로 최후의 순간을 맞았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아침 7시 정각, 김재규는 사형 집행실로 향했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전날 녹음으로 유언을 남겼음인지 짧게 두 마디를 했다.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부하들이 눈에 밟혔다.
집행관이 다시 스님과 목사를 모셨으니 집례를 받겠느냐고 물어도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광덕 스님과 김준영 목사가 새벽부터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다만 "나를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직 인사를 했다.
사형이 집행된 후 그의 손에는 집행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긴 염주와 작은 염주 2개가 그대로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독실한 불자가 스님의 예불을 왜 마다하였을까? 그의 말대로 이미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구차한 절차를 생략한 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피안으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주석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