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과 귀족, 화랑들이 자리를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석정.
경북매일 자료사진
포석정 '유상곡수연'의 풍류 속에서 진짜 인재를 찾다
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는 포석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
"서거정이 쓴 '동국통감(東國通鑑)'에 포석정지 근처에 성남이궁(城南離宮·왕의 별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포석정은 이궁에 딸린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설치된 정자와 수로를 모두 포함한 이름으로 생각된다. 현재 정자는 없고 수로만 존재한다. 포석정은 다듬은 돌로 축조된 전복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수로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울창한 느티나무 숲 속에 있는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수로에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하고 그 잔이 자기 앞을 지날 때 시를 한 수 지어 읊는 유흥)을 즐겼던 곳이다."
어렵지 않게 그때의 풍경이 그려진다. 왕이 주관하고 다수의 고관(高官)들이 함께 하는 주석(酒席). 높은 벼슬아치의 아들인 화랑 여러 명이 성남이궁 포석정에 모였다. 짙푸른 숲 속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는 청아하고, 푸른 하늘엔 솜털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은 화랑들은 왕이 호명하며 내리는 제 몫의 술잔이 앞에 도착하기 전에 '멋진 시 한 편'을 생각해둬야 한다. 화랑들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혼잣말을 했을 것이다.
"이번에 왕과 대신들의 눈에 든다면 궁궐로 불려가 높은 벼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술을 마시더라도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주사(酒邪)를 부려서는 안 된다. 나는 풍류도를 배워온 신라의 지식인이 아닌가."
신라시대 포석정에서의 연회(宴會)는 단순히 '놀고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직 임명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어떤 화랑이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도저한 깊이에 올라있는 것인지'를 선별해 내는 일종의 테스트가 아니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포석정은 안쪽 12개, 바깥쪽 24개의 다듬은 돌로 조립됐고,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의 양쪽은 돌 6개, 출수구 꼬리 부분은 4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수로의 너비는 31cm, 깊이는 21~23cm, 길이는 대략 22m쯤 된다.
1991년엔 술잔이 수로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도 측정했다. 결과는 약 10분 30초. 그 짧은 시간에 왕과 대신들의 마음을 뒤흔들 시를 떠올려 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상태가 아닌가… '품성과 재능을 인정받는 화랑'이 된다는 건 이처럼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풍류도'를 제대로 체화(體化)한 화랑이 가려졌다면 자긍심이 높았을 수밖에 없었을 터. <화랑세기(花郎世記)>는 화랑들이 가졌던 프라이드(Pride)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전에 선도(仙徒)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하였음으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 드넓은 명산대천으로의 유람도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에서 홍성암은 "공동체적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이념"이 풍류도라 규정하며, 그 성격을 다음과 추정하고 있다. 이는 화랑도가 지향하는 목표와도 맥이 닿는다.
- 개인적인 것보다 집단적인 행위를 통해 수련을 쌓는다.
- 사회적 규범으로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
-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긴다.
- 수련 과정에서 능력이 인정되면 나라의 인재로 등용된다.
홍성암이 요약한 4번째 항목이 '젊은 리더를 가려내는 포석정의 연회'를 지칭하고 있다면, 3번째 항목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는 21세기식 문법으론 '여행을 통한 자아의 성장'이라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오늘.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까진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배낭을 메고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1300~1500년 전 신라의 화랑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한 서술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등장한다. 아래와 같다.
"실제로 풍류, 즉 화랑도의 유래는 '선(仙)'에서 나왔다. '선'은 불교 수용 이전부터 신라에서 숭배했던 신격들을 통칭하는 말로 여겨지는데, 삼산오악(三山五岳)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신들이 바로 그 '선'에 해당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화랑도는 그 시초부터 명산대천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던 것이며, 그들의 수련 장소로 전국의 주요 산과 강이 선택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로 신라시대 화랑들은 동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금강산의 풍경과 마주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지만, 당시의 교통 환경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감통편(感通篇)엔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강원도 통천 일대를 유람한 기록과 진평왕(재위 579∼632) 시대 화랑인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이 풍악(금강산) 여행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우스개 같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단상(斷想) 하나.
'풍류도'에 기반해 성장한 신라의 청년 화랑들은 문재(文才)와 바른 주도(酒道), 여행을 통한 내적 성장까지 골고루 요구받았다.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청춘이 왜 이리 버겁고 힘겨운 것이냐"라는 푸념은 당시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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