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소작쟁의 탑암태도에 있는 소작쟁의를 기념하는 탑 전경
이영천
암태도는 '소작쟁의'로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섬이다. 소작쟁의는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일제 관료와 경찰, 암태도 소작인들 간에 벌어진 소작료 전쟁이었다. 문재철은 암태도 출신으로 전형적인 친일부역지주였다. 그는 암태도·자은도 등 신안의 여러 섬과, 전북 고창 등지에 엄청난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면적이 약 750만㎡(약 226만평)라 하니, 엄청나게 광활한 토지다.
1923년 쟁의 당시 문재철이 암태도에서만 소유한 농지가 약 139만㎡(약 42만평)였다고 한다. 섬의 농토 전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때 소작료는 농지임대료(地代)와 농사경비를 공동으로 부담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경비까지 합해야, 총 소출의 5할을 넘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낮은 곡식 가격을 지켜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과 동남아 점령 등, 전쟁을 수행할 기반이 필요했다. 따라서 군수산업 기반의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값싼 노동력의 동원이 필수였다.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강제 징용된 노동력에, 자국 노동자들의 저임금 유지가 전쟁수행의 첫 관문이었다.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은, 식량 가격을 낮게 유지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강력한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암태도 대지주 문재철의 수익이 점차 감소했다. 그러자 문재철은 소작요율을 대폭 인상시켜 이를 만회하려 한다. 아니 욕심도 과했으리라. 무려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려 한다. 이에 암태도 소작인들이 반발한다. 소작인회의를 조직한다.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4할로 인하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문재철은 거절했다.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와 소작료 불납동맹으로 이에 맞선다. 이때 목포경찰서는 일본경찰을 출동시켜 소작인들을 협박한다. 일본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문재철은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려 했다.
문재철은 악랄했다. 개개 소작인에 대한 회유와 협박에 나선다. 소작인들은 단결력으로 이에 대응했다. 자체 순찰대를 조직하여 1924년 봄까지 소작료불납항쟁을 계속 이어 나간다. 1924년 3월 27일 면민대회를 열어 소작인의 단합을 과시하며, 몇 가지를 결의한다.
'5월 15일까지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문재철 측에서는 폭력으로 대응해 왔다. 면민대회 후 귀가하는 소작인들을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아울러 면민대회에서 결의한 소작인들의 주장을 묵살하면서 버틴다. 사사로운 시비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작인들은 이런 사정을 언론에 호소한다. 언론들은 연일 암태도 소작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배후에는 일제가 있었다. 집요한 일제의 탄압이 계속된다. 그러자 화가 난 소작인들이, 4월 22일 문재철 아버지 송덕비를 부숴버린다. 이 자리에서 문재철 측 청년들과 충돌이 있었고, 소작인 50여 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된다.
소작인들은 6월 2일 면민대회를 다시 열고 강경투쟁을 결의한다. 소작인들 400여 명이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시위농성을 벌인다. 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농민들은, 굶어 죽을 각오로 맞서기로 한다. 7월 8일부터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26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암태도 농민들의 투쟁 소식에 각계각층 인사들이 지지를 보내준다. 변호사들은 무료변론을 자청하기도 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제 전 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일제는 소작쟁의가 더 확산된다면, 통치기반에 큰 균열이 올 것을 염려한다. 또한 쟁의가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급기야 중재에 나서게 된다.
결국 소작료는 4할로 조정되고, 쌍방 간 고소·고발도 모두 취하된다. 부서진 비석은 소작인들 부담으로 다시 세우기로 한다. 1년여에 걸쳐 벌어진 소작쟁의는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후 도초·자은·지도의 소작쟁의로 이어진다.
소작농들의 분연한 외침은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 최후의 보루였다. 단결은 서로에게 위안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끈질긴 투쟁은, 악랄한 대지주와 일제의 부당성을 무너뜨렸다. 일제의 통치방법을 시정케 하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그런 끈질긴 힘에서 연유하였다. 그 항쟁의 힘은, 추포∼암태 간 노둣돌을 놓았던 백성들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과 강인한 끈기에서 발원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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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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