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858기는 사건이 있기 얼마 전인 1987년 9월 기체 고장으로 동체착륙을 한 적이 있다. 사진은 당시 KAL기의 실제 왼쪽 모습. 1987년 9월 2일 'MBC 뉴스데스크' 다시보기 화면 갈무리.
MBC
국정원 발전위원회 부분은 맞지만 진실화해위원회 부분은 틀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KAL 858기 사건에 대해 2007년 재조사를 시작했지만, 실종자 가족들이 신청을 취하해 2009년 조사가 중단된다. 결론이 없었다. 따라서 진실화해위원회도 사건이 북의 테러가 맞다고 했다는 말은 틀렸다. 나아가 위원회는 국정원 발전위원회 조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나는 2016년 정보공개를 청구해 진실화해위원회 재조사 기록을 열람했다.
"발전위 중간발표문 분석 결과 핵심 쟁점에 대한 의혹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으며 … 몇 안 되는 진술인들의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특히 안기부 관련자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칠 정도이고, 안기부 생산자료를 아무 의심 없이 증거로 채택하였고 … 주요 쟁점에 대한 사실관계 판단을 입증자료 없이 추정 판단한 경우가 여럿 있는 것으로 판단됨"(DA0799644, 105쪽).
국정원 발전위원회는 중간조사 결과를 2006년에 발표하고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최종결과를 2007년 공개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조사를 문제 삼은 것인데, 아쉽게도 그 자신이 철저한 조사를 하기에는 권한 부족 등 한계가 많았다. 아울러 국정원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개입하려 했다. 예컨대 국정원은 위원회가 김현희 면담을 추진할 때 세부 사항을 협의해주라고 요청했고, 담당 조사관은 그것이 "효율적"이라며 조사의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하려 했다(DA0799649, 8쪽). 이런 과정 등을 보면 가족들이 진실화해위원회 재조사 신청을 왜 취소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국정원 발전위원회 조사는 어땠을까? 나는 앞서 말한 진실화해위원회 지적에 동의한다. 곧, 국정원 조사와 그 결과는 구조적 한계 등의 문제로 부족한 점을 많이 드러냈다(박강성주, <KAL 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 212~229쪽). 물론 위원회는 나름대로 노력했고 성과도 냈다. 하지만 폭파범으로 알려진 김현희를 조사하지 못했다는 치명적 결함을 보였다. 그럼에도 위원회는 KAL 858기 사건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확인"했다고 밝힌다(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III>, 560쪽). 무리한 결론이었다.
당시 조사를 맡아 최선을 다했던 민간위원도 이 한계를 인정했다.
"정작 사건의 주범인 김현희에 대한 면담 조사가 무산됨으로써 조사 결과에 대한 대국민 신뢰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이창호,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 활동에 대한 평가," <민주법학> 37호, 9쪽).
결국 KAL기 재조사를 반대하는 입장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 국정원 발전위원회의 문제적 결론을 맥락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둘째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활동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정부는 기체 추정 물체에 대한 현지 '수색'을 말하고 있지, 전면적인 '재조사'를 얘기하고 있지 않다. 수색은 항공 사고 및 사건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하겠다.
현지 조사가 중요한 이유
한편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동체 '추정' 물체가 KAL 858기의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최종교신 지점 문제와 연결된다고 알고 있다(Tolis-Urdis-Tavoy 순서). 이번에 발견된 물체는 당시 교신 지점을 기준으로, 버마쪽 바다에 있는 Urdis와 땅에 있는 Tavoy(현 Dawei) 사이에 있다. 이는 공식 수사 발표 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이에 따르면 최종교신 지점은 Urdis이다. 그런데 최종교신 지점이 인도와 버마가 같이 관할했던 곳으로 Urdis에 앞선, Tolis였다는 진술과 정황도 있다(서현우, <KAL 858기 폭파사건 종합 분석 보고서>). 이에 따르면 이번 수색 지점은 KAL 858기 실종 추정지와 굉장히 떨어져 있고, 따라서 그 물체들은 KAL기의 것이 아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