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낡아버린 디지털 피아노
오세연
그랬던 내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첫째 딸이 여섯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아빠를 따라 결혼식장에 다녀온 딸이 '지붕 있는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결혼식장에서 본 그랜드 피아노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짜 지붕을 떠 바치고 있는 피아노를 살 수는 없고, 대신 디지털 피아노 한 대를 집에 들였다. 그런데 정작 딸보다 내가 더 설레고 좋았다. 그때부터 나에겐 야무진 꿈 하나가 생겼다.
"나의 로망인 <녹턴>을 연주해보리라!"
하지만 30여 년 만에 다시 치는 피아노는 결코 쉽지 않았다. 악보가 한눈에 읽히지 않아 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음을 찾아야 했다. 뇌에서 인식한 음을 손가락에게 지시해 건반을 누르는 전 과정이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머리도, 손가락도 굳어있었다. <녹턴> 한 곡을 연주하는 데 20분 이상이 걸렸으니, 말 다 했다. 하긴... '닭장' 탈출 이후 피아노 건반 한 번 눌러보지 않았던 내가 다짜고짜 '녹턴'을 쳐보겠다고 덤볐으니, 무리도 이런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밤, 애들을 재우고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헤드폰을 끼고 나만의 세상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친 듯이 피아노를 쳤다. 다음 날이면 손가락과 손목으로 연결된 근육이 당겨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실력은 쉽게 늘지 않았다.
몸으로 익힌 것은 절대 까먹지 않는다던데 난 왜 이럴까... 괜스레 야속한 마음도 들고, 조금씩 지쳐갈 무렵 기분 전환 삼아 제일 만만하다고 생각했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쳐봤다. 그런데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아... 완전히 잊어버렸구나. 이쯤 되면 피아노 치기를 포기했을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그럴수록 <녹턴>에 대한 나의 갈망은 더 커져갔다.
"혹시 나한테 프로포즈하려고 연습하는 거야?"
남편의 우스갯소리를 웃어넘기며 그렇게 나는 매일 피아노를 쳐댔다. 어차피 헤드폰으로 나만 듣는다 생각하니 부끄러움도 창피함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까, 느리지만 그래도 제법 구색을 갖춘 <녹턴>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다시 <엘리제를 위하며>를 쳐봤다. 그런데! 손가락이 스스로 움직였다. 연습 한 번 안 한 곡인데 저절로 쳐지다니, 나는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내 안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만 같았다.
'꾸준히'의 효과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