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묘양녕대군 묘
이정근
임금(태종)이 일찍이 충녕대군(이후 세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그리하여 서화書畫(글과 그림), 화석花石(무늬 돌), 금슬琴瑟(서로 짝을 이루는 현악기) 등 모든 놀이의 내용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기에, 충녕대군은 예술에 정통하였다.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왕자시절의 세종에게 '방목형 교육'을 제공합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태종의 자상해 보이는 말은, 왕이 될 가능성을 '꿈도 꾸지 마라'는 셋째 아들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덕분에 세종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가업 승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종에 이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맏아들의 숙명이었지요.
태종은 3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습니다.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자신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정안공靖安公(이후 태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인데요. 정종실록을 보면, 정안공이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9개월 남짓인데, 그나마 교육받은 횟수는 3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종이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한 엘리트라 해도, 그가 접한 학습은 공무원의 직무에 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자 교육의 부족을 체험하고, 자신의 후계자는 체계적으로 양성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위한 교육제도이자 교육장인 서연書筵, 세자 교육을 맡은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여기에서 교육을 수행할 세자사世子師(정일품正一品, 의정부 영의정 겸직) 및 세자부世子傅(정1품, 좌·우의정 중 1인 겸직), 세자이사世子貳師(종1품, 찬성이 겸임), 세자빈객世子賓客(정·종2품),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등을 두었는데요. 현재 일인자의 맏아들이자 미래의 일인자를 길러내는 일이므로, 변계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에 대한 세자 교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주체를 대체로 학습자·학부모·교사로 봅니다. 양녕의 교육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지다
양녕대군은 임금이 갖추어야 할 지식·태도·역량의 함양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한, 그리고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진 수험생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가 있다면, 경쟁자도 동료도 없으며, 합격은 '떼어 놓은 당상'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양녕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임금이 글을 외우도록 명했는데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양녕의 시중을 드는) 환관의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서연관을 벌하겠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사간원司諫院(왕권을 견제하는 언론기관)에서 상소하였다...... "신들이 일전에 서연 일기를 보니, 닷새 동안에 잇달아 경전 해석한 날이 적습니다." (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세자가 팔뚝에 매를 받치고 궁궐 문밖으로 나가고, 또 아프다며 핑계 대고 강의를 듣지 않았다...... 세자가...... "내가 병이 있으니 회복되면 저녁에 당직하는 서연관과 함께 복습을 하겠다" 라고 말하였으나, 저녁이 되어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16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