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판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국가기록원
재판은 초장부터 검찰과 변호인단의 팽팽한 대결 속에 진행되었다.
변호인단은 먼저 10월 27일 4시를 기해 선포된 비상계엄은 헌법과 계엄법에 명기된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비상계엄선포가 유효함을 전제로 설치된 계엄군법회의에서 피고인 김재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과, 김재규는 군인(또는 군속)이 아니며 또한 그에 대한 공소 사실은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계엄선포 이전의 민간인 행위에 대해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변호인단의 합리적인 문제 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재판정에는 비밀 녹화장치가 되어 건건마다 합수부의 지침에 따라 진행되었다. 심지어 변호인들의 '김재규 장군'이란 호칭도 법무사가 나서 "경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을만큼 '기울어진 법정'이었다.
재판 자체도 보안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의 지침에 따라 진행됐다. 군사법정의 진행상황은 유신체제 아래서 중정에 파견됐던 공안검사들에 의해 면밀히 청취되고 시나리오가 짜여졌다. 이들이 재판정의 막사 뒤에서 그때 그때 지침을 적은 쪽지를 보냈다. 그래서 이 군사재판에 대해 '쪽지재판'이라는 비아냥이 나돌기도 했다.
이는 10ㆍ26사건의 군사재판이 구체제 타도자에 대한 체제수호세력의 단죄를 위한 각본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증거였다. 역사적 전환기를 가져온 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가리는 순수한 재판이 될 수가 없었다. (주석 5)
김재규는 검찰의 무례한 언사나 재판부의 고압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시종 차분하고 당당하게 진술했다. 처음에는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되었다가 김재규의 담당변호인으로 10ㆍ26 사건의 역사적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안동일 변호사의 목격담이다.
4차 공판에 이르기까지 김재규의 법정 태도는 매우 차분하고 겸손하면서도 무척 당당하게 보였다. 모든 진술에 있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적이고 장내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검찰관과 재판부로부터 한쪽으로만 몰아붙이는 듯한 신문을 받아도 자세 한 번 흩트리지 않고, 용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준비된 설교처럼 대응하였다. 특히 범행 동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위축됨이 없이 더더욱 소신껏 진술하였고,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어느 것이나 우리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주석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