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주남마을에 세워진 위령비. 80년 5월 23일 화순으로 가던 버스에서 공수여단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고, 공수부대에 의해 다시 사살돼 암매장된 2명을 기리고 있다.
이돈삼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시위대가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광주로 넘어갔다. 계엄군에 의해 사상자도 나왔다. 너릿재로 오가는 길목인 주남마을 인근의 양민학살도 화순으로 가는 버스에서 일어났다.
5월 23일 오전 11공수여단이 18명이 탄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5명이 현장에서 죽고, 3명이 부상을 입어 계엄군에 붙잡혔다. 계엄군은 붙잡은 남성 2명을 사살해 뒷산 헬기장 인근에 암매장했다.
너릿재의 아픔은 광복 직후에도 있었다. 1946년 8월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이 고개를 넘다가 미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았다. 1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1950년 7월에는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된 사람들이 너릿재 인근에서 학살됐다. 9월에는 광주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이 끌려나와 너릿재를 넘어 화순읍 교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능주 출신의 한말 의병 양회일이 이끈 의병부대도 1907년 화순을 점령하고, 너릿재를 넘어 광주로 가려다가 매복한 관군에 패했다. 양회일 의병장도 여기서 붙잡혔다. 1519년 기묘사화로 능주 유배길에 오른 정암 조광조도 너릿재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광주에서 화순과 보성·장흥으로 오가던 이들이 넘나들던 너릿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