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자료사진
김재규는 부장에 취임하여 비교적 온건노선으로 중정을 운영하였다.
그동안 정보부가 해온 행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의 쇄신이 필요하고, 불교도인 그의 성품이 극렬주의가 아니었다. 또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강경노선이 지속되다가는 자칫 국가적인 파국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였을 것이다.
그의 중정부장 재직시는 내외적으로 유신의 억압체제가 스스로의 하중(荷重)을 견디지 못해 삐거덕거리던 때였다. 체제의 유지는 긴급조치 9호 등 억압조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를 중정부장으로 임명한 박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면을 보고 임명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김재규 취임 이후 일련의 유화 제스처가 나타났다.
79년 1월 시인 김지하의 면회 허용, 김철 통일사회당고문의 석방(3월 31일), 민주구국헌장 지지서명운동 관련자들의 석방(5월 10일), 긴급조치 9호위반 복역수 중 신부, 목사, 학생 등 14명의 석방(7월 17일), 시인 고은의 석방(10월 29일), 민주구국선언 관련자 11명의 석방(12월 31일)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에 김재규의 역할이 어느 정도 미쳤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가족들에게 "다른 정보부장들이 사람을 잡아들이는 부장이었다면, 나는 놓아주는 부장"이라고 자부했다고 한다. (주석 10)
다른 기록도 살펴보자.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로 재야 활동이 극히 위축됐던 유신 말기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지식인들은 김재규 부장의 온건 노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기숙 전남대 국문과 교수는 1978년도에 소위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돼 동료 교수 11명과 함께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송기숙 교수는 "죽을 고문을 당할 각오를 했는데, 수사관이 상부지시라며 의외로 부드럽게 조서를 받더니 그냥 풀어 줬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한동안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으나 10ㆍ26이 나자 "아하 싶었다."고 말했다. (주석 11)
김재규의 손위 동서로 당시 중장의 일본 책임자(대외직함은 주일공사)였으나 10ㆍ26 직후 미국으로 피신했던 최세현 씨의 증언.
김재규의 거사는 우발적인 것인가 계획적인 것인가, 단정할 순 없지만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78년 내가 고려대 교수로 있을 때 김상협 씨, 김재규, 나 셋이서 점심을 먹던 자리였다. 김상협 씨와 내가 구속한 학생들 좀 석방하라고 했더니 김재규가 하는 말이 비장한 표정으로 "조금만 기다려라" 라고 했다. 조금만이라는 게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 벌써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고 본다. (주석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