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도의 해안 데크와 목포대교. 고하도 해안의 진면목을 편하게 걸으면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이돈삼
고하도는 육지면을 처음 재배했던 곳이다. 1904년 목포 주재 일본영사에 의해 심어졌다. 육지면은 고려 말에 문익점이 붓대롱에 숨겨 들여온 재래면과 달리, 남미가 원산지다. '미국면'으로도 불린다. 새하얀 데다 올이 길고 섬유도 잘 꼬여 품질이 재래면보다 한결 좋았다.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 수확량도 많았다.
여기에서 시험 재배된 육지면이 목포 전역으로 퍼졌다. 순천 등 전라도 동남부 지방까지 보급됐다. 전라도에서 재배된 목화솜은 목포와 광주, 군산 등지의 방직공장에서 고급 면직물로 가공됐다.
일제는 목포항을 통해 자국으로 면직물을 빼내 갔다. 목포는 쌀, 소금과 함께 하얀 목화솜까지 일본으로 빼앗기는 강제 수탈창구가 됐다. 일제강점 때 목포를 '삼백(三白)의 도시'라 한 이유다.
이순신을 모신 사당 모충각에서 가까운 데에 '조선육지면 발상지비'가 세워져 있다. 비는 높이 183㎝로 크지 않다. 1936년에 처음 세워졌다. 해방 이후 주민들에 의해 뽑혀 버려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