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남구 구동 22-3 광주공원의 권율 창의비 왼쪽에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 오른쪽에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가 서 있던 광경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조선을 망하도록 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거물 친일파들이다. 2019년 8월 이들 두 친일파의 선정비는 철거되었다.
정만진
구한말 최대의 친일 단체 일진회
1904년에 결성된 일진회(一進會)는 송병준과 이용구가 이끌었다. 1858년 함경도 장진에서 태어난 송병준(宋秉畯)은 고종 8년(1871) 무과에 급제했다. 열넷에 과거를 통과했으니, 열일곱 나이로 등용문에 오른 을사오적 이지용과 어깨를 겨룰 만한 '큰 도둑'의 소지를 보였다. 예로부터 '머리 좋은 나쁜 놈은 나라를 팔아먹고, 머리 둔한 나쁜 놈은 좀도둑이 된다'고 했다.
경기도 양지 현감, 경상도 흥해 군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고, 인삼을 불법 반출하여 일본 등지에서 팔기도 하던 송병준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 소장 오다니 기쿠조(大谷喜久藏)의 통역으로 귀국했다. 그는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적 성장을 도모했다.
186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이용구(李容九)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손병희(孫秉熙, 1919년 3·1만세운동 민족대표)의 우익장을 맡아 수 천 교도들을 이끌고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한 열렬 동학교도였다.
이용구는 일본에 망명 중인 손병희가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을 꾸리라는 명을 보내오자 전국 곳곳의 동학교도들을 모아 1904년 9월 진보회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로 가는 이용구
송병준은 이용구보다 한 달가량 앞선 1904년 8월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이내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송병준은 전국 조직을 갖춘 이용구와 손을 잡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판단, 그해 12월 진보회와의 통합을 성사시켰다. 그 후 이용구는 13도 지방 총회장, 송병준은 평의원장을 맡아 일진회의 두 축이 되었다.
온갖 친일 행각을 일삼던 일진회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10여 일을 앞두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보호 청원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Hague)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을 때에는 일제가 고종을 밀어내고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강제하는 공작의 선두에 섰다.
7월 16일 고종 퇴위 후 진행된 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 한일 신협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1909년 12월에는 일본과 한국이 한 나라로 합쳐야 한다는 성명서 '국민 2천만 동포에게 서고(誓告, 나라의 큰일을 알리는 일)'를 발표, 병합 여론 조성에도 선두에 섰다.
일진회 "조선 민중은 한일합방을 바란다" 성명 발표
일제는 제3차 한일협약 이후 '지방 군수들을 일제히 경질했다. (새로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모두가 일진회 계통의 친일 상놈과 천민이었다(박성수,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그러나 일제는 1910년 9월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를 해산시켰다.
이용구는 일진회 해산 경비로 5000원, 조국 멸망에 기여한 '공'으로 10만 원을 받았지만, 자신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두려워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12년 5월 22일 불과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송병준 67세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는 자작 작위를 받았고, 총독 자문기구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으며, 1911년 은사 공채 10만 원도 받았다. 1920년 백작으로 승작되었고, 1921년에는 중추원 친임관(親任官, 일본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관리로, 조선총독부에는 총독과 부총독 격인 정무총감 두 명뿐이었다.)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해마다 3000원씩 수당을 받았다.
1925년 2월 1일 그가 죽자 일본 왕은 포도주 12병을 보내 슬픔을 표시했다. 총독 사이토(齋藤實)는 직접 조문을 왔다. 서울 장례식 시간에 맞춰 도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서는 동시에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과연 송병준은 을사오적 이지용에 맞먹는 거물 친일파였던 것이다. (이지용과 송병준은 사망 당시 이력까지 비슷하다. 둘은 모두 죽을 때 중추원 고문이자 친일단체 동민회 고문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