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책 <순애>의 앞표지
생애
엄마의 글을 받아들고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내게 남는 건 '그리움'이었다. 그 시대 어르신들의 삶이 다들 그렇지만 1930년생 엄마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 전쟁.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내시며 그야말로 치열하게 삶을 지탱하셨다. 그런데 엄마의 기억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그리움이라니 놀라웠다.
'황해도 진풍면 내안리 675번지'
번지까지 정확히 기억하시는 엄마의 고향, 그곳에는 엄마의 어린시절 추억이 있고, 엄마의 어머니가 있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젊음 가득한 엄마가 있었다. 숨 막히는 현실을 이겨내고 꿋꿋이 현재를 살아내었던 멋진 소녀 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때가 그리웠던 게다. 여름날 싱그런 나무 같았던 그때.
"엄마, 이야기가 왜 결혼하기 전까지 밖에 없어? 결혼하고 우리들 낳고 살아온 이야기는 왜 안 쓴 거야? 안 행복했어?"
"그걸 뭐하러 쓰냐? 남들 사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살았는데. 니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써야 재밌지."
엄마가 소녀였던 시절만 있는 엄마의 원고를 들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건너뛰어버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엄마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주시며 연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내가 그때는 왜 그랬나 몰라~"
말씀을 이어가다 가슴이 먹먹해지시는지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하시며 내가 물어보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주셨다. 엄마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야간학교 교사를 하며 남편을 만났다. 지금은 1남 2녀 모두 잘 살고 있다."
아마도 엄마의 진짜 삶은 여기까지였나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저 엄마로 살아오셨나보다.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단지 엄마가 엄마였던 시절에는 그리워하고 추억할 만한 자기 자신이 없었던 게다. 내가 추억하는 엄마를 엄마 글에서 찾을 수 없어 이번엔 내가 먹먹해졌다.
놓쳐버린 시간, 떠나버린 엄마
2015년 12월 내 이름을 단 책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다음 해부터 1년 혹은 2년을 간격으로 계속 내 이력으로 삼을 만한 책이 세상에 나왔다. 덕분에 나에게는 조금씩 더 많은 일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책이 한 권씩 늘어나며 나는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 안의 소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소망을 입으로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언젠간, 언젠간, 이라고 말하며 간절히 원하지만 아직은 부담스러운 나의 꿈을 조금씩 소화시키고 있었다.
1인 출판사! 남들은 반백 년을 넘게 살고나면 하나둘씩 일을 정리한다. 어떻게 하면 은퇴해서 편안한 삶을 살까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꿈을 꾸며 그 꿈이 1인 출판사라고 공공연히 소문을 내고 다녔다. 자꾸 말하다 보면 "왜 아직도 안 해요?"라는 질책을 듣게 될까봐, 혹은 허풍선이나 거짓말쟁이처럼 보이게 될까봐 결국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내 마음에 용기를 주는 훈련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인 출판사에 대한 강의를 3번, 4번 들으러 다녀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괜한 욕심을 부리고 있나 고민하기도 했다. 왜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지만 하고 싶은 일... 고민을 미뤄두고 바쁘게 강의를 하고 다니느라 어느새 엄마의 노트는 책상 한구석에 다른 책들에 눌린 채 잊히고 있었다.
엄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약해지신 엄마는 결국 요양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셨다. 책상 위에 있는 엄마의 노트를 볼 때마다 초조해졌다.
'어떻게 대충이라도 정리해서 빨리 책을 만들어야 하나... 어쩌지, 엄마 살아생전에 책이 나오는 걸 보여드리면 좋아하실 텐데. 고작 7쪽 되는 글로 어떻게 책을 만들지?'
아무리 고민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 엄마는 어느 날 문득 이 세상 소풍을 끝내버리셨다. 2019년 7월이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멀리 살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해 엄마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엄마의 노트를 들고 아무것도 못한 시간이 죄송하고 부끄러워 울고 또 울었다. 지치도록 울다가 울다가 갑자기 엄마의 책을 만들어낼 용기가 생기고 제목이 떠올랐다. '순애', 엄마의 이름 그대로를 살려내리라 생각했다. '모두가 힘들었던 그 시절, 30년생 그녀의 이야기 <순애>'
그렇게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책의 내용보다 책의 제목이 먼저 정해졌다. 그리고 엄마가 엄마였던 시절을 살려내기 위해 가족들의 추억을 모으기 시작했다.
드디어 완성한 엄마의 첫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