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최광지 홍패紅牌. 고려 창왕 1년인 1389년에 발급된 과거급제증서로, 국새가 찍힌 고려의 공문서로서 유일하게 현존한다.
연합뉴스
이성계는 이후 홍건적·여진족·몽고족·왜구 등을 토벌하며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하고,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신진사대부의 신망을 얻으며 고려의 '전국구 정치인'이 됩니다. 차차 공훈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지분을 확보해 나가며 급기야 고려의 왕위에 오르고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지요. 이 과정에서도 이방원의 기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이성계 일파의 정적을 제거하는 등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아들을 넘어 혁명 동지에 버금가는 존재였습니다.
아들을 죽이려 한 아버지, 태조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 7년 차인 1398년,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각하며, 자신이 후계자로 세웠던 막내아들 이방석을 잃고, 차남 이방과(제2대 임금 정종)에게 왕좌를 물려줍니다. 명목상 임금에 가까웠던 정종은 약 2년 후 양위하며 본격적으로 이방원, 즉 태종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던 태조는 4년 후인 1402년, 자신의 본거지인 함흥 지역에서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직·간접으로 관여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저격하는 일을 주도 혹은 참여한 것이지요. 이십여 일 만에 반란군이 궤멸하지만, 태조는 돌아올 줄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함흥차사 이야기가 비롯됩니다.
태조는 처음에 덕원德源(현재의 함경도 문천군)으로 갔다가 또 함흥으로 갔는데, 문안 사절로 가서 죽은 사람이 속출하였다... 태종이 찾아가서 간곡히 청하니, 무학대사가 어쩔 수 없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 "방원(태종)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그 사람만 남았는데,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니 내 혈족에게 주는 것이 나으니,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 태조가 그의 말이 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행차를 돌릴 마음이 생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조조太祖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긍익이 야사를 종합한 책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조는 마중 나온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고 소매에 쇠방망이를 숨겨오는 등 환궁하는 순간까지도 아들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으나, 태종에 대한 태조의 실망과 분노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조聖祖(태조)께서 조사의의 진영에 머무르셨는데... 조사의가... 마침내 관군官軍(정부군)에 잡혔습니다. 이에 수신帥臣(도의 국방 책임자) 이천우·이빈·최운해 등이 성조를 호위해 평양을 경유해서 개성에 돌아오시므로, 태종께서 금교역金郊驛(현재의 황해도 금천군의 역)에 나가 맞이하셨습니다." (숙종실록 13년 1월 7일)
마지못해 궁으로 복귀하였으나 여전히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랭합니다. 문안 인사마저 받지 않을 만큼 아들 보기를 꺼리더니 5년여 후에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한 잔을 권합니다.
임금(태종)이 덕수궁(태조의 거처)에 나아가 문안을 드렸다. 이전에는 임금이 자주 덕수궁에 나아가도 접견하는 일이 적었는데, 이날은 태상왕太上王(태조)이 침전寢殿(침실)으로 불러들여 술을 권하니 취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가까운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돌아가는 길에 피리를 연주하라." (태종실록 7년 9월 20일)
그 옛날처럼 거나하게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태종은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습니다. 그리웠던 아버지의 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부자에게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같은 상사喪事를 당하니 슬픔이 미칠 데가 없구나. 내가 무인년(1398년) 가을에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도모했는데[제1차 왕자의 난], 그 뒤 부왕(태조)께서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내가 생전에 순종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시게 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보니 부왕께서 승하하셨는데, 어찌 차마 잊어버리고 서둘러 정무를 볼 수 있겠는가?" (태종실록 8년 6월 21일)
부자 관계가 회복된 지 8개월여 만에 태조가 승하합니다. 한 달이 지나도 업무에 복귀할 수 없을 만큼 태종의 충격은 큽니다.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건만, 한 꿈을 꾸었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정치 논리에 휘말린 가족사를 돌아보며 회한이 일었겠지요. 그는 나이 마흔에도 아버지의 정이 고픈 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태종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한없이 마음 약한 아버지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