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여고 재학 시절(왼쪽)과?들불야학 강학 시절(오른쪽)의 박기순
윤상원기념사업회
들불을 지핀 영혼, 박기순
그는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동신강건사에 일당 800원을 받는 조립 견습공으로 입사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 강의를 하는 생활에 돌입한다. 이것은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으로도 알려졌는데, 재작년 박기순의 40주기를 맞아 평전 <스물두 살 박기순>을 펴낸 그의 고교동창이자 루사RUSA 서클 친구였던 송경자 작가는 "기순은 위장 취업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로 살고자 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이브, 광천동 성당에서 들불야학 팀은 박효선이 만든 노동현실 고발극 '우리들을 보라'를 공연하고 윤상원과 백재인 강학의 자취방에서 밤새 뒤풀이를 했다. 크리스마스 날 저녁까지 강의실에 쓸 땔감을 구하기 위해 박기순은 그들과 함께 광주 소년원 뒷산에서 나무와 솔방울을 모았고, 광천공단 실태조사팀을 꾸릴 궁리를 하며 자정이 다 되어서야 오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틀 만에 겨우 들 수 있었던 그 단잠은 박기순의 영원한 잠이 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거의 모두가 쫓기는 삶을 살았던 탓에 기록으로 남은 그의 흔적은 인색하지만, 스스로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 남아 일부 전해진다.
가난한 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로
덕을 입고 있는 대학인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은
불합리하게 혜택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난한 자와 함께
진정한 역사 창조의 대열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
그의 영결식이 치러지기 전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의 역사들이 시간을 메웠다. 1년 6개월 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그 심장이었던 전남도청의 한복판을 윤상원과 들불야학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지켰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2월, 광주민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여동생이자 박기순 올케인 윤경자의 제안으로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이로 인해 박기순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한 신부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왔다.
김상호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의 증언에 따르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박기순과 윤상원이 연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이름조차 대놓고 맘껏 불러볼 수 없었던 엄혹한 시대의 상황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가족으로서의 그리움과 상실감 등이 얽혀 이 두 사람의 애달픈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엮어 전하게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고, 영혼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황석영은 그들의 사연에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몇 구절을 꺼내 엮어 가사를 만들고, 야학 경험과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이 있었던 작곡가 김종률이 곡을 붙여 그의 삶과 죽음을 또 하나의 노래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에서 일을 하다 귀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으로도 전해져 태국, 캄보디아, 홍콩 등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