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김영천씨.
변상철
"동수가 '생명줄'을 내려줬다"
- 제주에서 화물기사로 생활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원래 제 고향은 전남 나주 쪽이에요. 제주에 내려온 지는 한 40년 정도 됐고요. 아내와 결혼하고 처음에는 전라도 광주에서 장사를 하다가 가게가 잘 안 되어서 제가 먼저 제주로 내려와서 귤 선별하는 일을 했어요. 그 일을 5~6년 정도 하다가 용달차를 사서 화물기사로 일했죠. 처음에 10톤 차를 샀다가 나중에 4.5톤으로 바꾸기도 하면서 차량 종류가 여러 번 바뀌었지요."
- 그럼 다른 제주의 화물기사 분들과는 어떻게 알고 지내셨나요?
"화물을 하면 짐을 받아주는(화물접수처) 사무실이 있어요. 서귀포에도 사무실이 있고 서울에도 있습니다. 화물기사마다 짐 받아주는 사무실이 다 다를 수도 있는데, 제주에서 서울 오가는 배를 타면 결국 모두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용선이나 길옥이나 동수도 그렇게 알고 지냈지요. 배에서 화물기사는 한 방에 8명씩 자는 대합실을 같이 쓰는데 그렇게 지내면 서로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죠."
- 세월호에는 어떻게 타게 되셨나요?
"서울에서 짐을 싣게 되면 한 군데서만 싣는 게 아니에요. 인천, 서울, 곤지암 등 경기, 서울, 인천지역의 화물을 싣게 되는데 인천에서 저녁 6시 반쯤 출항하면 제주에 아침 9시에서 10시쯤 도착을 해요.
그럼 오전부터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짐을 모두 내리고 다시 육지 가는 배를 시간 맞춰 탈 수 있는데, 목포에서 타는 배 같은 경우에는 제주항에 도착하는 시간이 한낮이라 그날 짐을 다 내리지 못해 하루를 더 허비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주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짐을 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름값도 더 들고 하니까, 기왕이면 아침부터 짐 다 내려놓으려고 인천에서 출발하는 배를 서로 타려고 하는 거죠."
저는 그때 강남에 사는 누나 아들 결혼식이 있어서 토요일에 결혼식 보고 누님 집에서 자고 다음날 인천에서 출항하는 배를 찾아봤어요. 인천에서 출항하는 배를 찾아보니까 월요일에 출항하는 오하마나는 다른 화물 기사들 배차 순서에 밀려서 짐을 싣기 어려워 다음날 출항하는 세월호에 짐을 싣고 타게 된 것이죠."
- 그 당시 기억나는 대로 말씀주세요.
"제가 그때 4.5톤의 축이 달린 차를 타고 있었어요. 구입한 지 5개월밖에 안 된 새 차였지요. 그래서 결혼식 갔다가 인천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남동공단에 가서 전선을 싣고, 다음에 판교 가서 의료 기구 싣고, 곤지암으로 이동해 짐 하나를 더 싣고, 마지막으로 송도 월곶으로 와서 호텔에 들어갈 큰 TV 8대 실었어요. 그 날 차에 실은 짐이 한 2억 원어치 됐어요.
그렇게 짐을 거의 다 싣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지금 안개가 심하게 끼어 예정보다 세월호가 빨리 출항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름도 넣지 못하고 서둘러 인천에 도착해 제일 마지막에 승차를 했습니다. 그때 보니까 우리 사무실 차 4대가 세월호 탑승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안개가 심해 출항하지 못할 것 같아 목포로 운전해서 내려가자는 생각으로 4대 모두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사들이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을 한 터라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인천부두 앞에다가 차를 대놓고 잠깐 밥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밥을 먹는 사이에 안개가 좀 걷혔더라고요.
저는 밥 먹고 잠깐 차에서 자고 있었는데 청해진 직원들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곧 출항한다고요. 그래서 곧바로 세월호에 다시 승선한 거죠. 배에 올라보니 출항 결정전에 이미 학생들은 배에 승선해 재미있게 놀고 그런 것 같더라고요."
- 출항하신 이후에는 어떠셨나요?
"저는 대개 배를 타면 아침 7시에 아침밥을 먹습니다. 식당이 오전 8시면 문을 닫는데 그날은 전날 늦게 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을 못 먹었어요. 아침에 화장실을 가는데 근처 매점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화장실에 있는 나를 부르더라고. 뭐 먹을 거냐고. 그래서 떡국에 물 부어 놔라 했죠.
그렇게 화장실에서 나와서 방에 잠깐 들렀더니 그때 마침 아침 8시면 나오는 MBC드라마를 하더군요. 그리고는 떡국이나 먹으러 가자하고 매점으로 일어서는 순간 배가 한 쪽으로 팍 꺾이고 그 순간 저는 화물기사 방 맞은편 목욕탕 쪽으로 쓰러졌죠.
기사 방 맞은편 목욕탕 쪽 문에 무릎을 찧고서야 간신히 바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배가 45도 정도 기울어진 것 같은데 배가 그 상태로 계속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이게 말이 45도지 난간대 같은 거 없으면 서 있기도 힘들어요.
게다가 세월호는 통로가 너무 넓어서 반대편 난간대를 잡으려면 한 번에 뛰어서 잡을 수가 없어요. 게다가 배가 기울어져 있었잖아요. 그나마 젊은 애들이야 이쪽 난간대에 있다가 저쪽으로 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지만 나같이 나이가 든 사람은 한 발 걸치고 간신히 잡고 있기도 힘들었죠. 그때 승무원 안내가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가만히 있으라고.
나중에 보니 사고 당시 객실이 아니라 객실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만 살았던 것 같아요. 기울어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으니까요. 나도 한 발 걸치고 간신히 버티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좀 있으니까 배가 더 기우는 거예요. 그래서 95도 정도 되니 그때는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더라고. 이거 진짜 배가 넘어가는구나. 그런데 구조하는 사람도 없지, 방송에서도 이렇다 말이 없지, 이걸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올라가야 하는지, 정신 없었어요. 정말.
그때 동수가 위에서 줄을 내려줬어요. 생명줄이었죠. 남자들은 잡고 올라오는데 여자들은 못 올라왔어요. 줄을 붙잡을 힘이 없으니까. 나도 나이가 많아서 처음부터 위쪽 난간을 붙들지 못하고 밑에서 올라왔다면 살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올라오니 그때 첫 번째 헬기가 딱 오더라고.
헬기가 선원들 나오는 쪽으로 먼저 가길래 보니까 그 사람들 먼저 싣고 갔더라고요. 그러다 두 번째 헬기가 왔다 가고, 세 번째 헬기가 왔을 때 난간 잡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바구니가 내려왔어요. 동료 기사들이 저한테 '형님 나이가 있으니까 먼저 헬기 타시라'고 양보해주어 저를 포함해 네 사람이 탔어요. 남은 기사들은 난간대 잡고 물 쪽으로 내려갔고 그때 다른 배들이 구조하러 온 거죠. 헬기로 올라가면서 보니까 배가 막 잠기고 있고. 참.
정신없이 실려서 서거차도에 내려서 보니까 구출된 학생들이 옷 젖은 채로 있었어요. 내 기억에 어떤 목사님이 방도 내주고 이불도 내주고 그랬어요.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전화기를 켰죠. 저는 배 타고 나가면 통화가 안 되는 곳에서는 배터리만 잡아먹으니까 늘 꺼놓거든요. 다행히 물에 빠지지 않아서 전화기도 멀쩡한 상태라 먼저 집에 전화를 했죠. 고사리 따러 나갔던 아내는 제 전화를 받더니 배는 넘어갔다고 하지, 연락은 안 되지 하니까 죽었다고 생각해 딸이랑 울고불고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아내와 통화한 후에 학생들에게도 제 전화기를 빌려줘서 각자 부모님에게 전화하도록 했어요. 나중에 팽목항으로 이동하니 그곳에서 생존자 숫자를 세는 거예요. 생존자를 파악하는 중에 학부모들이 와서 자기 자식 있는 사람은 안도해서 울고, 못 찾은 사람은 못 찾은 사람대로 우리 자식 어디 있냐고 울고, 아주 비참했어요. 우리 제주 화물기사들도 정신없이 나와서 숫자를 세보니 윤길옥이랑 광명에 살던 기사가 안 보이더라고. 난 두 사람이 죽은 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 화상을 입어서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하더라고."
"언론에도 상처 입어... 원인 규명 꼭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