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철
- 삼다수 공장 일은 고정적인 일인가 봐요.
"아내 명의로 되어 있는 차를 가지고 지입차로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어요(이혼했다지만 그는 전처를 아직도 아내라고 불렀다). 삼다수 공장이 꽤 크거든요. 전국적으로 나갈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도 많이 나가요. 팔레트 하나에 2리터 6개짜리 생수 묶음이 96개가 실려요. 그게 많이 나갈 때는 하루에 3000개에서 5000개가 나가요."
- 화물차 운전은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1988년부터 화물을 했어요. 그때는 돈을 잘 벌 때였죠. 그러다가 IMF 때 화물차 팔고 대구로 갔어요. 대구에 가서 스트링공장을 차려서 섬유 일을 했습니다. 구미에 있는 한국합섬 실을 받아다가 사업을 크게 했는데 동업하던 사람이 돈을 들고 해외로 도망가는 바람에 공장 차압되고 저는 제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도망 왔어요.
그렇게 돌아와서 좌석버스를 1년 정도 하다가, 그 회사마저 부도가 나서 다시 실업자가 되었죠. 어찌어찌 5톤 화물차를 구입하게 되어 육지로 화물차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세월호가 빵 터져 버렸죠."
- 세월호 참사 당시 자녀들 나이가 어떻게 되었나요?
"아들이 고등학교 막 졸업할 때였습니다. 아들이 취업도 못 하고 병수발 하면서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옆에서 전부 보더니 세상 살기 싫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군대에 갔는데 제대할 때쯤 세상 나오기 싫다면서 부사관으로 지원해서 직업군인으로 살더라고요.
딸은 더 심해요. 딸은 저와 같은 정신과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어요. 세월호 때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거든요. 고등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하고 대학도 진학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딸만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세월호에는 윤씨의 화물차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에게 줄 선물도 실려 있었다고 했다).
- 사고 이후에도 화물차 운전은 계속하시네요.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죠. 화물차랑 빚이랑 정리되면 서울 올라가서 치료받으면서 제주도는 아주 안 내려 오려구요. 서울에 운전하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운전기사 자리는 있을 거예요. 월급 300~400만 원 준다고 하는데 돈을 보면 타고 싶지만 배를 못 타는 게 문제예요. 내가 세월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는 정신은 살아 있는데, 몸이 반응하는 거예요.
2017년 화물차를 새로 사 올 때 목포에서 배 타고 오는데 파도가 아주 잔잔한 거예요. 기사들 방에 있는데 땀이 줄줄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파도가 나도 배멀미가 없는 사람인데 땀이 줄줄 나면서 쓰러져 버리는 거예요. 세월호 사고 이후로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 어떤 배도 못 타요. 비행기를 타도 마찬가지예요. 비행기 타면 기도를 하게 돼요. 무사히 가게 해달라고."
"종교도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 어떤 것이 힘들게 하는 걸까요?
"제 종교가 천주교예요. 세월호 나기 전에는 한 번씩 미사를 갔는데, 사고 이후로는 전혀 못가요. 두려운 죄책감 때문에 가지 못하겠습니다. 성당에 가면 세월호에서 구하지 못한 학생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데도 발을 다쳐서 걷지 못해 못 구한 사람들, 냉장고에 깔린 학생들, 그런 생각과 죄책감에 도저히 가지를 못하겠는 거라, 고백성사도 못하고 다 못하는 거라, 자동적으로 종교하고도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 세월호 참사 당시 어디에 계셨나요?
"원래 인천에서 배를 자주 타고 다니니까 승무원들하고 친했어요. 사고 나고 나서 여승무원인 박○○하고 둘이 있었어요. 그 승무원에게 나가자고 하니까 자기는 사무장하고 같이 나갈 테니 먼저 나가라고 해서 나 혼자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승무원이 죽어서 나왔더라고요. 그런 기억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후회되는 게 그 승무원 멱살이라도 잡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게 후회돼요."
- 탈출은 어떠셨어요?
"입구까지 7~ 8미터 정도 되는데 물속으로 들어가니까 입고 있는 구명조끼 때문에 자꾸 천장에 몸이 붙어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도저히 못 나오겠다 싶어 포기하는 찰나에 이제까지 겪었던 삶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거라. 마침 그날이 우리 아버지 49재날이었는데 제사도 못 보고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몸이 물 밖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배가 잠기면서 배 안에 있던 공기와 물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때 튕겨 나온 거죠. 나와서 보니까 주위에 배는 아무것도 없지. 마침 저 멀리 해군 배가 보여서 거기까지 헤엄쳐 갔어요. 가는 중에 학생들이 탄 고무보트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겨우 안전바를 잡고 질질 끌려서 해경 배에 옮겨 탔어요. 해경들이 나를 부축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손을 뿌리치고 기다시피 해서 난간 쪽으로 갔어요.
함정에서 진도군 어업지도선으로 옮겨탔어요. 보니까 그 안에 세월호 선원들이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우리보다 어떻게 선원들이 있고 선장이 있는가 해서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바닷물에 빠져서 떨리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화도 못 내고 팽목항까지 왔죠. 거기서 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받았지요."
- 치료를 받으셨나요?
"곧바로 올라갔어요. 한강성심병원에서 한 1년 이상 치료받았죠. 그곳에서 피부이식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아직 감각이 없어요. 한여름에도 다리가 시려서 양말을 신고 잘 정도예요. 나만 그런가 해서 보니까 같이 화상을 입은 김재영한테 물어보니 그도 그렇게 발이 시리대요.
이게 십중팔구 평생 앓아야 하는 병이 되어 버린 거죠. 근데 2024년까지 치료비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는 내 돈 들여 치료해야 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떨 때는 개미가 무는 것처럼 따끔따끔하는데 잠도 못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