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집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친필 글씨(외솔회 소장)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상동교회 내 조선어강습원 1기 졸업생인 최현배 선생은 1914년 경성고보 4학년 재학 당시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 동래에까지 내려가 한글강습회를 여는 등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다.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준 스승 주시경은 그해 7월 급체로 38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박용규 박사 제공)
박용규
"그때 또 누가 계셨던가요?"
"최현배 씨, 권덕규 씨, 김두봉 씨, 장지영 씨, 아니 장지영 씨는 아니군."
"박승빈 씨는 안 계셨던가요?"
"박승빈 씨는 안 계셨습니다."
"그러면, 주시경 씨와 박승빈 씨와는 학설에 관한 토론이 그전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주 선생이 생존하실 때는 박승빈 씨가 우리 말에 관한 연구를 하신다는 것도 몰랐으니까요. 지금 와서 박승빈 씨 설이 나왔다는 것도 주 선생은 모르실 것입니다."
"주시경 씨는 어느 분의 학설을…."
"아니지, 주 선생이야 자기가 혼자서 연구에 착수하셨지요. 지금은 다들 한글이나 우리 말이니 하지마는, 그때만 해도 우리 말을 연구한다면 특수한 사람으로 들릴 땝니다. 선생이 처음 이희종이란 어른께 한문을 배우다가 해석을 조선말로 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러면 결국 글이란 말의 기록인데 우리 말을 두고 이렇게 어려운 한자를 배울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연구에 착수하셨다니까요."
"주 선생의 성격은?"
"그저 강직했지요. 청렴하기 그지없었고, 일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안 대신 어른이십니다. 뭣이요? 아니지. 그러시면서도 일체의 살림을 혼자 도맡아 하시었지요. 한번 수창동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가보니까 몸소 기둥을 닦고 도배를 하고 마루를 훔치고 하십니다."
"주 선생에 관한 일화로 혹 지금도 생각나시는 것은 없으십니까?"
"글쎄…일화… 아, 한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 작고하셨던 지는 잘 기억이 안 되나 선생이 상주가 되셨을 적에 우리가 문상을 갔더니, 조그만 종이쪽을 내보이십니다. 조선에서는 '상사말씀 무슨 말씀 하오리까'라고 하면 상주는 입속으로 어물어물할 것이 예인데, 선생은 '아버지를 여윈 내가 무엇이라 하리까'든가 하여튼 이런 것을 아주 씨 가지고 계십디다."
"식성은 어떠셨던가요?"
"원래 청렴한 분이라 생활도 검박해서 별로 어떤 것을 좋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중국요리를 잘 잡수신 것만은 기억됩니다."
"주 선생이 언제 작고하셨던가요?"
"벌써 이십여 년이나 되지요. 천재란 단명한가 봅니다. 삼십구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말에 관한 의문이 생기면 선생이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하고, 그런다면 지금 와서 새삼스러이…."
신씨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선생은 아끼는 마음은 사제간의 정의(情誼)도 정의려니와, 우리를 선생의 완전한 계승자로 만들어 놓지 못하고 돌아가신 게 원통합니다. 선생의 그 무서운 정력(사실 주시경 선생은 천재라기보다는 정력가시지요. 그 정력이란 무서웠으니까) 만이라도 우리가 나누어 가졌어야 할 텐데…."
신씨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씨의 얼굴에는 그 '무서운 정력'이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주석 1)
주석
1> 『동아일보』 1938년 1월 28일자, 최철호, 「주시경에 관한 신명균의 글 역자」, 『주시경 학보』 제3집, 264~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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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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