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를 하고 있는 한상도 교수
강은혜
그러나 이날 발제를 맡은 건국대 사학과 한상도 교수는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홀대와 경시에 대해 서운함과 분노를 느꼈다"며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였음을 밝혀냈다.
한 교수는 그 첫 번째 근거로 김구의 생전 발언 등을 기록한 <백범김구선생언론집>에 수록된 구절을 지목했다.
"중국 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각 기관들은 시종 임시정부의 명의를 쓰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왕래하지 아니하는데 7•7항전(중일전쟁) 이전에는 왜국(일본)과의 교섭에서 분쟁이 우려될 수 있지만, 항전이 시작된 후에도 의식관계라 하여, 정부의 명의를 쓰지 않고 있다. …(하략) …"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공식 명칭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임시정부 측에서는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기록이다. 개인 차원의 동정이나 지원과는 별개로, 국익 및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중국 당국과 임시정부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한 교수는 "중국 언론은 임시정부를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로 간주•평가했고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중국 국민당, 공산당 토벌에 광복군 동원 계획 세워"
1939년 8월 당시 국민당 정부는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소집된 '한국독립운동통일7단체회의'를 주관•지원했는데, 국민당 조직부장이었던 주자화(朱家驊)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상략) 나머지 5개 단체가 진정으로 단결하여 공산당의 음모에 저항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아울러 좌경적인 성향을 지닌 한인들을 감화시켜 더 이상 공산당에 이용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한인독립운동진영 내부가 안정될 수 있었다."
한 교수는 1944년 10월 8일, 쑨커(孫科) 이사장이 중한문화협회 성립 2주년 기념식에서 한 발언도 꼬집었다.
"이번 세계대전이 동맹국의 승리로 마감됨으로써,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각국은 속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대일작전 역량을 강화시키도록 하고, 무장한 한국 인민이 중국의 반공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