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엽 전 소장
이안수
[기사 수정 : 14일 오전 9시 3분]
2003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한 고등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형과 아버지 이렇게 세 식구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1년 동안 태국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었던 어머니는 은퇴를 하자마자 평소 소원이던 타국에서의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1년 동안 봉사를 택한 그녀의 실천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2018년 5월 캄보디아 방문길에 두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반떼이민쩨이주의 주도인 시소폰(Sisophon)에 있는 민쯔이대학교(Mean Chey University, MCU)와 바탐방 주의 주도인 바탐방에 있는 바탐방대학교(UBB, University of Battambang)였습니다. 두 대학 모두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어 있었고 그 교수진은 대부분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봉사단인 월드프렌즈코리아(WFK)와 중장기자문단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코이카가 2003년 캄보디아 사무소를 개소한 이후 가장 많은 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가 한국어교육입니다. 그곳에서 교직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은퇴자들이 재교육을 받고 한국의 가족과 떨어져 최소한의 체류비용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참고 : 바탐방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한국어 말하기 발표 https://youtu.be/Mj9podb7WLA)
제가 부러워했던 미국 고등학생 어머니 같은 선택을 한 수많은 한국인이 세계 곳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음을 확인한 기쁨은 제가 한국인이라는 큰 자부심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한국인이 개발도상국가로 봉사를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외교부 산하의 원조전문기관인 KOICA에서 수원국의 필요를 조사하고 최소한의 체류비 지원과 안전을 담보하는 시스템 덕분입니다. 지난 4월 1일은 KOICA가 창립된 지 29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수원국에서 공여국이 된 대한민국은 은혜를 갚는 도의적 역할을 함과 동시에 많은 개도국의 희망과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 한국의 우정과 개발경험을 전파하고 있는 KOICA의 역할과 그리고 앞으로의 기대들에 대해 듣기 위해 코이카 창립멤버의 한 사람으로 KOICA 8개국 해외사무소장 역임 후 한국교원대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했던 송인엽 전 소장을 만났습니다.
#1
- 2018년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유라시아 대륙을 마라톤으로 횡단한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와 일정을 함께하며 후원을 해오셨잖아요. 평화마라톤 후원일은 계속하시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는 인류 아니 생명체 유일무이하게 지구를 이미 한 바퀴 발로 뛰었지만 내건 두 가지 목표가 이 지구상에 안착될 때까지 계속 달려야 하니까요. 5월에 한라산 백록담에서 시작해 남한을 종주해 백두산 천지까지 달리는 일을 기획했는데, 불행히도 코로나가 만연하여 시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실행하게 되면 DMZ까지야 문제없겠지만 평양에서 길을 열어주어야 북녘땅 종주가 가능하니까, 북쪽에 성의를 다해 요청해 보고 답이 없다면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수까지 2개월 동안 달릴 예정입니다. 10월에는 베트남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2500km를 우리의 2가지 목표에 해원상생(解寃相生)의 기치를 추가해서 2달 동안 종주할 예정입니다." (관련 기사 : 두 다리로 유라시아 건넌 강명구 "최고의 한류스타는 김정은" http://omn.kr/1ehgl)
- 2중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기획이군요. 북한의 입장과 코로나19의 팬데믹 장벽을...
"예, 하지만 평화통일 노력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니 노력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 이번에는 KOICA에 대한 얘기들을 여쭙고 싶습니다. 지난 4월 1일이 코이카 창립 29주년(1991년 4월 1일 창립)이었잖아요. 송 소장님께서 직접 코이카의 창립에 참여하셨지요?
"코이카 창립이야 국가적인 결정이었지요. 저는 당시 하위 실무자로서 법안 준비에 필요한 자료 수집 등 기본적인 일에 열심이었죠. 그리고 1991년 3월 말에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국제협력단법이 통과되어 보람을 느꼈죠. 그 후 코이카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국내의 모든 실무부서는 물론 8개국의 해외사무소장을 포함해 23년간 몸을 담았었습니다."
- 코이카 출범부터의 활동이 우리나라에서 전례 없던 소중한 경험들이군요. 그때 쌓은 전문성들이 묻히기는 아쉬운 일인데...
"네. 2013년 4월 정년퇴직 후에는 대학과 기관이나 기업에서 특강을 통해, 또한 NGO에 자문역할을 하며 그동안의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원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는 외교학의 전문분야인 국제협력을 정규과목(3학점)으로 가르쳤습니다."
- 코이카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이 나라마다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리 빈국이라 하더라도 모든 나라들은 대통령도 있고 외교부와 국방부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협력단이 정부기구로 있는 나라는 세계를 통틀어 20여 나라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 국제개발처(USAID,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라고 1946년 설립되어 비군사 원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영동AID아파트 기억하시지요? 이 아파트들이 USAID로부터 받은 차관으로 지은 아파트입니다."
- 그래서 영동AID 차관아파트라고 했지요? 지금은 삼성동 힐스테이트로 재건축되었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이 일본국제협력단(JICA, 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이 197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기관들이 자국민을 위한 역할을 하지만 국제협력단은 유일하게 외국 국민을 위해 일하는 특이한 기구입니다."
- AID아파트를 예를 들었습니다만 우리는 지금의 성장을 이루기까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렇습니다. 1945년부터 1992년까지 받은 돈이 약 140억 달러 정도입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2600억 정도에 해당합니다."
- 특히 급속 성장의 마중물로 역할을 한 종자돈이라는 점에서 액수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대단한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 종잣돈을 주면 지속가능 성장하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그것을 크게 발전시킨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개도국에 병원을 지어 주거나 직업훈련원을 건설해 주면 공여국이 직접 관여하는 2, 3년은 잘 돌아가는데 10년 뒤에 가보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종잣돈이 수백 배의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예로 현재 코로나19상황에서 공공의료 기관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은 1954년에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가 총 400만 달러를 지원해 준 것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중앙직업훈련원은 독일이 1천만 달러를 준 것이고요. 우리 젊은이들이 독일로 가서 광부로, 간호사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해서 독일이 지원한 것입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정'자와 육영수의 '수'자를 넣어 정수직업훈련원이라고 했지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도 1965년도에 미국이 1천만 달러를 지원하여 설립된 거예요. 당시 우리의 월남파병 등에 감사해서 미정부가 특별 지원한 것이지요.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은 이와 같이 선진국의 지원을 발판 삼아 열심히 일해서 몇 백배로 성장시켰지요. 그래서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다른 나라는 그게 안돼서 힘이 들어요. 이러한 현상을 '원조의 피로'라고 하지요. 그래서 저는 해외에서 일할 때 대통령부터 농민까지 만나는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에게 우리나라의 이런 성장을 예로 들어줍니다. 그러면 귀담아듣고 꼭 한국처럼 잘 성장시키겠다고 다짐들을 하지요."
- 전 세계적으로 K-Culture가 파급되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과 코이카의 역할도 상관관계가 있지 싶습니다만...
"K-Culture에 대한 사업은 코이카의 남매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교류재단(KF: Korea Foundation)이 직접적으로 하고 있고, 코이카도 간접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사실 개도국들은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공여를 받아서 성장한 한국이 공여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희망을 함께 전해주는 효과가 있어, 그들이 더욱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2
- 1991년 코이카 창립에 대한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코이카 창립은 우리가 못 살 때는 원조를 받았지만 이제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 관심을 갖겠다는 의지의 반영인 것이지요. 또한 당시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고픈 욕심을 낼 때였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볼 때 한국은 여전히 전쟁의 폐허로 기억되는 가난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어요. 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원국이 아니라 공여국이라는 위치가 필요했습니다.
국제사회에 1982년부터 국제협력단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정부수립 이후 줄곧 수입초과국이었지만 1988년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도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국제사회에서의 압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1991년 4월에 마침내 KOICA가 출범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