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김동수의 고통은 곧 아내의 고통이기도 하다. 서로를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김형숙
김동수님은 소위 '파란 바지의 의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그 날 마지막까지 배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다 나왔지만,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수차례 자해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 그를 돌보는 가족들 역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생존자모임이 생겨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한다. 그는 현재 제주의 사려니숲길에서 아내 김형숙씨와 함께 숲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3월 28일 국가폭력피해자 기억공간인 수상한집에서 부부를 만나 인터뷰했다.
- 세월호 참사 당시 이야기는 여러 번 하셔서 물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세월호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1층에는 철근, 목재를 비롯한 여러 화물과 무거운 중량의 화물차 등이 실렸고, 2층에는 나머지 화물차와 승용차 등이 실렸습니다. 차량들은 이미 여러 번 방송에도 나왔듯이 바퀴에 버팀목으로 고정했고, 화물차들도 앞뒤로 하나씩 와이어로 묶고 바퀴에 버팀목을 넣었습니다. 3층에는 화물기사 숙소, 직원 숙소, 일반인 객실 등이 있고, 선수 갑판 쪽에는 컨테이너 등을 비롯해 가벼운 화물이 실려 있어요. 그 위로 4층과 5층에도 일반인 객실이 있습니다."
- 사고 당시에는 어디 계셨나요?
"2014년 4월 16일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46분경 아내와 통화하고 기사들이 쉬는 방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급회전하면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어요. 창밖으로 보니 컨테이너 화물들이 바다에 떠 있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 구명조끼를 입고 동료 기사들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해서 나와 보니, 선내 방송으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3층 후미 쪽으로 나와서 난간에 의지해 상황을 살피며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가 많이 기울어지지 않아 금방 구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마라톤동호회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9시 15분경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고 4층 중간지점으로 이동하다 보니 2~3명이 커튼으로 사람들을 끌어 올리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일반호스로 구조해봤으나 구조가 어려워 소방호스를 던져 사람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호스를 감아 끌어올렸죠. 10여 명 정도 끌어올리자 통로에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학생 한 명이 급하게 '아저씨, 빨리 와 보세요'라고 해서 앞쪽으로 이동했더니 8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아래에 보였습니다. 대략 8미터 정도 되는데 경사가 져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소방호스로 사람들을 구조했습니다."
- 그렇게 구조활동을 하면서 많이 힘드셨겠어요.
"수 십 명 정도 구조할 때쯤 헬기에서 해경 몇 명이 내려와 상황을 살피고 올라간 후 빈 바구니만 내려줬습니다. 그런데 난간 구조물 때문에 바구니가 온전히 내려오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 사람을 구하다 말고 쓰레기통을 밟고 올라가 바구니를 잡고 사람들을 태워 올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구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서 나머지 사람들은 먼저 구조된 사람들이 구조해 줄 것이라 믿고 다시 후미 쪽으로 이동해 다른 사람을 구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배는 더 급속히 기울어졌고, 선실 창문을 통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봐야 했습니다. 마지막 배가 가라앉기 전 학생들이 '아이 있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 아이를 끌어올려 구조보트에 넘겨줬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