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한인애국단>의 표지
정만진
1910년대는 대한광복회, 1920년대는 의열단, 1930년대는 한인애국단이 의열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대한광복회는 망국의 충격과 일제의 무단통치에 짓눌려 독립운동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1910년대에 전국 조직망을 갖추고 일제와 맞섰고, 대한광복회의 활발한 활동은 국민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910년대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국내에서 조직된 단체'인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의열단에 대해 '민족운동 사상에 끼친 공헌이 매우 컸다'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60만 원(현 시세 약 200억 원)의 현상금을 건 일제가 의열단 김원봉 단장에게 그보다 많은 100만 원(320억 원)을 걸었다는 말은 의열단 활동이 지녔던 파괴력을 상징해준다.
40여 명밖에 남지 않은 상해의 독립지사
임시정부 초기만 해도 상해에는 1000여 명의 독립지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초창기 임시정부는 국가 중추기관으로서 외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 독립신문도 발간했다. 또 국내 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용하는 등 왕성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재정난 등 여러 사정으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점차 쇠약해졌다. 1931년 11월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맡고 있던 김구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창립했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암살과 파괴 전문 기구를 산하에 둔다는 것은 임시정부의 새로운 노선 천명이었다.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의 이종암·김익상·오성륜이 상해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했을 때만 해도 임시정부는 "폭탄 사건과 가정부(假政府)는 절대 무관계"라는 성명서까지 발표했었다. 신혼여행을 왔던 서양의 스나이더 부인이 그날 유탄에 맞아 사망했는데, 임시정부는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까 염려하여 의열단을 폭력단체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비하했었다.
그런 임시정부가 9년여 세월이 흐른 후 의열단의 노선을 반복하는 한인애국단을 창립한 것이다. 그 이전에도 한인애국단의 전신이라 할 만한 병인의용대가 있기는 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이유필이 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인 나창헌이 부대장을 맡고 있었지만 그래도 임시정부의 공식 산하 기관은 아니었다.
한인애국단 제 1호 단원은 이봉창
한인애국단의 활약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봉창의 일본왕 폭사 기도 의거와 윤봉길의 홍구 공원 의거이다. 두 지사의 거사는 세계적 주목을 받았고, 장개석은 그 이후 "중국 정부군도 도모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청년 한 사람이 해낸다!"고 격찬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봉창과 윤봉길 외에도 이덕주·유진만·최흥식·유상근·이화림·김홍일 등의 지사들이 한인애국단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 정규군 장군이었던 김홍일은 이봉창과 윤봉길 등 한인애국단 거사에 폭탄을 공급했고, 김구의 비서 직무를 수행했던 평양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세부 역할도 대단했다. 대련에서 일제 요인들을 집단 폭사시키려다 피체된 유상근 지사는 해방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1932년 9월 29일 김구 '동경 작안의 진실' 발표
이봉창이 사형선고를 받기 바로 전날, 김구는 이봉창의 일본왕 폭사 기도 의거의 전말을 기록한 <동경 작안의 진실>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작안은 폭탄 투척 계획 정도의 뜻이다. 동경 거사가 이봉창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의미를 상기시키기 위해 발표된 '동경 작안의 진실' 등에는 김구와 이봉창이 주고받은 말들이 남아 있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고 해서 늙은 나이에 무슨 즐거움이 대단하겠습니까? 저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폭탄이 손에 들어오면 기필코 일본왕을 죽이겠습니다."
"아! 이봉창 동지의 인생관이 참으로 위대하오! 내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쏟지 않을 도리가 없구려!"
윤봉길과 김구가 헤어지는 장면도 너무나 애잔하다. 죽으러 가는 길인 1932년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자신의 시계를 풀어서 김구에게 내민다. 김구가 '시계는 왜?'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윤봉길이 말한다.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새 것입니다. 선생님 것은 2원짜리 헌 시계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한 시간 후면 시계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