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김종철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디 오차드 티 가든(The Orchard Tea Garden)은 전통적인 영국식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겉으로 보기엔 수수하고 조그만 건물이지만,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곳은 영국의 내로라는 작가와 학자들이 즐겨찾아 이야기를 나눴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과거 영국에서 이름 꽤나 날렸던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이야기하던 곳"이라고 말했다.
조그만 통로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보니, 한쪽 벽면에 주요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 소설가인 애드워드 포스터, 디에치 로렌스, 철학자인 버렌트 러셀, 아일랜드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쇼,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이다. 우리는 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창 밖을 가리키면서 "날씨만 좋았다면, 저 가든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 좀전에 '이번 기회에 새로운 사회체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어쩌면요. 우리나라가 가만 보면 엄청난 민족이거든요. 정말 자랑스러워할 것도 많고, 창피스러운 것도 많고…(웃음) <나쁜 사마리안>이라는 책 서문에도 썼지만, 제가 1963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우리 기대 수명이 52세였어요. 우리가 그대로 정체해 있었으면, 난 지금쯤 죽었어야죠.(다시 웃음)"
-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보면, 현대차가 처음 자동차를 만든 양이 2000대예요. 그나마 미국 포드에서 반완성품 형태로 수입해서 조립해 만들었던 것이 1968, 69년쯤이었을 겁니다. 그때 당시 누군가가 '앞으로 45년 후 (현대차가) 미국 제너럴모터스보다 차를 더 많이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면, 아마 정신병자 취급 당했을 거에요. 당시 지엠은 1년에 450만 대를 만들던 시대였으니까. 당시 한국 현대차는 회사도 아니었죠. 근데 45년만에 뒤집었잖아요. 영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텔레비전 값이 일본 소니가 가장 비싸고 좋았지만, 지금은 삼성과 엘지 가전이 가장 비싸고 품질도 좋잖아요."
- 창피스러운 것들은요.
"(웃으면서) 그것도 많죠. 세계 최장 노동시간에, 남녀 임금격차는 30% 정도인가요? OECD 국가중 단연 1등이에요. 자살률 최고, 출산률 사상 최저… 젊은이들은 '헬(Hell) 조선'이라고 하잖아요. 전쟁을 거쳐서 고도성장,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한마디로 국가 디자인을 잘못한 거죠. 정말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있는 민족이거든요. 그런데 왜 '지옥'이라는 말이 나오게 됐냐는 거예요."
15년동안 복지국가를 떠들고 다니다
그는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어 장 교수는 "그래서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사실 복지분야는 제 전공도 아니지만, 지난 15년동안 복지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고 다녔다"고 덧붙였다. 정말 그랬다. 기자가 장 교수를 처음 만났던 지난 2003년 이후 그와의 대화에서 '복지'라는 단어가 빠졌던 적은 거의 없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 가운데 "복지의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면서 복지 지출이 단순히 부담이나 비용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을 줄여주는 것"
(관련기사 : "무상급식은 공짜가 아니라 보험 '공동구매'" - 2012년 인터뷰),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무슨 대단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관련 기사 : "복지 좀 누리자는 게 대단한 혁명인가? 기업들, 세금 안내려면 아프리카에 가라" - 2011년 인터뷰) 등이 떠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내놓은 복지공약을 두고는
"당선인 복지공약 뒤흔드는 사람들은 반역자"(2013년 인터뷰)라고도 했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내걸고 당선된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제대로 된 정책을 펴지도 못한 채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더 좌파적으로, 복지 획기적으로 늘려서 국민들 느끼게 해야한다"(2019년 인터뷰)고도 했다.
- 그동안 정권도 몇번 바뀌면서도 나름 복지예산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고 하는데요.
"(곧장) 아직도 멀었어요. 우리 복지지출이 국민소득 대비 10% 수준이에요. 신자유주의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남미의 칠레보다 낮아요. 정부가 세금을 걷고 복지로 지출하기 전에 국민 지니계수(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높을수록 불평등 정도가 심하다)가 0.34인데, 복지지출 이후에도 (지니계수가) 0.33으로 거의 그대로예요. 대부분 선진국들은 정부 지출 후 지니계수가 크게 떨어지는데…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소득재분배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거죠."
- 정부의 복지지출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군요.
"이게 문제가 뭐냐면, 소득 불평등을 시장 규제로만 (불평등) 정도를 낮게 유지해온 거예요. 물론 최근 10년 사이에 절대적인 소득 불평등은 낮은 편이지만, 불평등의 상승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아요. 얼마 전에 아카데미상 받은 영화 <기생충>이 딱 보여주잖아요. 그 가족 이야기가 우리 사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번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사회가 중요한 거고…"
"결국 시민권에 기반한 보편적 복지국가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