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기 목사(1875-1914). 상동교회 제6대 목사.
독립기념관
여기서는 여섯 분을 다 소개할 겨를이 없고 주시경의 경우만을 발췌한다.
주시경은 전덕기 목사보다 1년 연하이다. 전덕기 목사보다 연하의 인물은 주시경밖에는 없다. 주시경의 본 이름은 상호였다.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 태생이다. 13세 때, 즉 1888년에 서울에서 해산 물산 객주업을 하고 있던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상동으로 이사해 왔다. 주시경은 이때 처음으로 전덕기를 만났는데 그때 주시경은 12세, 전덕기는 13세로서 하나는 숯장사 아들, 하나는 객주집 주인의 아들, 그들의 그때 이름은 주상호와 전봉운이었다.
그러나 봉운이는 상동교회 사환 노릇을 계속했고, 상호는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 뒤 상호는 『대한 국어 문법』을 펴낼 정도로 국어학의 대가로 성장했고, 상동교회를 본거지로 하여 청년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주시경은 종로청년회 학관, 이화ㆍ휘문ㆍ배제 등 각 학교를 두루 다니면서 한글 강의를 했다. 그때 그는 언제나 교재들을 보자기에 싸들고 왕래했기 때문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주석 15)
주시경이 전덕기와 믿음을 갖는 동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00년 6월 배제학당 졸업예배 식전에서 아펜셀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도 크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는 이후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는 신앙인이었다.
주시경은 또한 강직하고 치열한 성품이면서도 대단히 정이 많고 온유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연구하는 사색인이면서 실천하는 행동인이었다.
주시경 선생이 전덕기와 정이 깊음은 물론 상동교회 온 교인들과도 믿음의 형제로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상동교회는 주시경이 활동하는 생활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주시경은 상동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던 시기가 국어 운동의 황금 시기였고, 국어 운동을 널리 펴서 국어학을 대중에게 깊이 심던 시기였다.
그는 한글의 과학화, 우리말 순화에 횃불이 되어 그의 짧은 생애(38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어 문화 발전에 큰 공적을 이룬 선구자가 된 분이다. 최현배ㆍ김윤경ㆍ장지영ㆍ이병기 등의 출중한 국어사랑, 나라사랑의 제자를 배출시켰고, 1908년 오늘의 한글학회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다. (주석 16)
주석
14> 전택부, 「전덕기 목사와 그 주변 사람들」, 『나라 사랑』 제97집, 261쪽, 1998.
15> 앞의 책, 271쪽.
16> 오동춘, 앞의 책,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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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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