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선생주시경 선생
한글학회
주시경은 1905년 29살이 되는 해에 을사늑변을 당하였다.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분노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고,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상소했으나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자결하였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칼날을 갈고 돌아왔다.
1906년 2월 남산에 조선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군주 노릇을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자강운동이 전개되고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봉기하고 최익현ㆍ임병찬을 비롯한 의병 지도부가 순창에서 피체되어 일본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같은 국난기에 주시경은 우리말ㆍ우리글 지키기와 보급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1905년 소위 「을사5조약」에 의하여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국망을 눈앞에 둔 절박한 시기에 이르자, 주시경은 그의 이러한 사상체계에 입각하여 더욱 헌신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시경은 이 위험한 시기에 만일 국어국문을 재발견하여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국민들 사이에 널리 보급시켜 놓지 못한 채 타성에 젖어 한문사용의 폐습에 지배되다가 다시 일본어ㆍ일본문자에 지배되어 국문과 국어를 잃어버리는 날에는 국권회복과 독립달성은 어렵게 된다고 보았다.
반면에 그는 만일 이 절박하고 위험한 시기에도 분발하여 나라사랑과 함께 자기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사랑할 것을 청소년 학생들에게 계몽하고 국어국문을 교육하게 국민들에게 교육시켜 놓으면 신진 청년들에 의하여 반드시 국권회복과 독립달성의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주석 7)
주시경은 이같은 신념을 갖고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전덕기 목사가 주도하고 신채호 등이 참여하여 1906년 창간한 『가뎡잡지』 교보원으로서의 역할이다. 이 잡지는 얼마 뒤에 『가정잡지』로 제호를 바꾸었다.
『가정잡지』는 1906년 6월 20일 내부 인가가 났다. 당시 사장은 유성준, 총무 겸 편집은 류일선, 교보원은 주시경ㆍ김병현, 회계는 유진태ㆍ전덕기 등이 맡아 6월 25일 제1호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1907년 1월까지 7호를 간행하고 나서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다.
그 뒤 1908년 1월 속간되었는데, 이때부터 사장은 류일선, 편집 겸 발행인은 신채호, 교보원은 주시경, 총무는 김상만, 회계는 유명혁이 각각 맡았다.
제2년(1908) 제1호부터 신채호가 편집과 발행을 맡는 새로운 체제가 된 것이다. 이 잡지는 현재 제2년 제1호(1908. 1, 5), 제3호(1908, 3.?), 제7호(1908.8.25) 등이 남아있으며, 제2년 제2호, 제4호, 제5호, 제6호 등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주석 8)
주시경은 여기서도 '교보원'이란 직함을 갖고 국문기사와 논설을 쓰고 편집과 한글 강해의 책임을 맡았다. 그가 『가정잡지』에 쓴 글은 제1년 제1호에 '국문', '력사', '지리문답', '평론', '위선', '논설' 등을 연재하고, 일부는 제6호에까지 계속되었다.
주시경은 또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에 협찬원(協撰員)으로 참여하고 기관지 『서우(西友)』의 편집을 맡아 많은 글을 썼다. 1906년 10월 서울에서 평안도ㆍ황해도 출신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한자강회ㆍ기독교청년회ㆍ국민교육회ㆍ언론인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우학회는 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개혁당운동ㆍ헌정연구회 간부들이 두루 가담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의한 사태의 근본적인 변동에 대처하여 종래의 개화운동을 국권회복운동으로 전환시켰다. 박은식ㆍ김병희ㆍ신석하ㆍ장응량ㆍ김윤옥ㆍ김병일ㆍ김달하ㆍ김석환ㆍ김붕준ㆍ곽윤기ㆍ김기주ㆍ김유탁 등이 발기하였으며, 정운복ㆍ강화석ㆍ유동작ㆍ최재학ㆍ안병찬ㆍ이갑ㆍ유동열ㆍ노백린ㆍ이유정ㆍ옥동규ㆍ정재화ㆍ박경선ㆍ이달원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 학회는 정치활동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학회라는 명칭으로 교육 진흥만을 표방하였으나, 그 실제적 목표는 '민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과 인권의 신장이었다. 즉 서우학회는 국권회복과 국민주권의 자유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다. (주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