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휩쓸었단 소식에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곧 씁쓸해졌다. 치부를 드러낸 대가인 것만 같아 그랬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신 계층 피라미드를 그 꼭대기에 위치한 어느 자본의 도움을 받아 상업영화화 해 성공했으니 이제 다음 차례는 영화 속 '반지하'들을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일일까.
'기생충'에는 유명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살며 상류층을 대변하는 박사장 가족과 반지하에 살며 하류층을 대변하는 기택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기택네보다 더 낮은 하류층도 있다. 상상도 못할 공간, 박사장네 비밀지하실에 사는 남자와 그의 아내다. 세 가족은 층층이 계층지어진 삶을 산다.
과외 알바를 넘겨준 명문대생 친구의 말대로 박사장 사모님은 '부자인데도' 착하다. 그에 비해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노래까지 만들며 단단히 준비한 기택 네는 명실상부 가족 사기단이다. 그럼에도 영화 보는 내내 나는 기택네 편이 된다.
특히 박사장네가 캠프를 간 동안 기택네가 남의 집 거실에 모여 파티를 벌일 때는 조마조마하며 들키질 않기를 바랬다.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고 박사장네 비밀지하실이라는 최하류층의 공간으로 숨어들 때는 하, 탄식마저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 말미에서 기택의 장남 기우가 희망찬 계획을 품게 됐으니 영화는 해피앤딩인 걸까?
"아버지, 저는 오늘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요. 대학, 취직, 결혼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이사 들어가는 날 저와 엄마는 정원에 서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도대체 어.떻.게?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계층 피라미드 위쪽으로 올라가 박사장의 집을 사고 지하실에 숨은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게 하겠단 계획. 그래 계획은 세울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계획이라는 그 계획이 도무지 근본적이란 생각이 안 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눅눅한 양말'을 비춘다. 기택네는 여전히 반지하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거다. 그런데 어찌 계획이, 꿈이 가능할까.
흙수저의 신분상승 방법은 세 가지란다. 고시를 패스하거나, 결혼을 잘 하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기우는 대학, 취직, 결혼은 뒤로 미룬다지만 그래도 세상의 상식으로 접근해보자. 기우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죽도록 공부해 전문직이 되거나 대기업에 취업한다? 잘생긴 외모로 부잣집 외동딸과 결혼한다?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아 보인다. 눅눅한 양말들처럼 그 가능성이 아무래도 눅눅하고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계획은 세울 수 있었고 꿈은 가지게 됐으니 우리는 그저 기우가 어서 희망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를 응원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하나 더.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어 기우가 '유명건축가가 설계한 집 - 반지하 - 비밀지하실'이라는 계층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랐다고 치자. 그럼 해피앤딩일까? 누군가는 반지하에, 또 누군가는 비밀지하실에 살아야 하는 피라미드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해도?
이제 그만 본론으로 가자. 앞서 밝혔듯 이 연재의 가장 큰 목적은 오는 4.15 총선에서 각 정당과 후보자들이 '교육과 계층 피라미드'란 거창한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비교분석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번 기사에서는 그 분석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관련한 사회학적 관점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려 한다. 이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훌륭한 책들이 많고 많지만 그보단 고등학교 교과서에 의존해본다. 그것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도 동일했던 교과서 내용에. 안 그러면 자칫 '사회주의' 용어 등장만으로도 내 사상을 의심받게 될 수 있으니.
의사와 청소부는 급이 다르다? : 계층을 바라보는 제 관점들
의사와 청소부가 같은 계층이 되어도 좋은 걸까? 의사는 상류층, 청소부는 하류층으로 계층 내지 계급 지어지는 사회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일까? 답은 어떤 안경을 쓰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위 질문들에 대해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서는 기능론(자유주의)과 갈등론(사회주의)의 서로 다른 시각을 소개한다.
기능론자들은 계층 피라미드의 밝은 면에 집중한다. 세상에는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일'과 '아무나 해도 되는 일'이 있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 특별히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이가 그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또 그의 일은 어렵고 중요하다. 그러니 그 보수의 수준이 매우 높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반면 청소부라는 직업은 누가 해도 상관없다.
어렵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당연히 낮은 보수만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직업 간 차별, 사회계층화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사회계층화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르게 배치하는 매우 기능적인 장치다. 능력에 따라 돈, 권력, 지위 등을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공정'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갈릉론자들은 기능론자들의 '공정'을 완전히 부정한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의 고소득이나 높은 사회적 지위는, 그들이 난해한 용어를 활용하고 그 자격취득 과정을 어렵게 하는 등 소수의 지위 독점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의사의 일이라고 청소부의 일보다 더 어렵고 중요할리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똑같이 어렵고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따라서 몇몇 직업이 다른 직업들보다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마르크스는 무산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단결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혁명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모두 평등해지는 것. 그것만이 대안이다.
현재까지 교과서엔 기능론과 갈등론만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세상도 존재한다. 추후 개정될 교육과정에는 반드시 반영되길 바라는 북유럽·유럽 사회의 관점, 즉 사회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에 여기서는 북유럽의 경우만 설명한다.)
북유럽 사회는 계층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갈등론자들의 관점을 취한다. 즉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이 이들 나라들의 기본전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추구할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행복할 권리'가 있는 존재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든, 지적능력이 어떠하든, 사람들의 삶은 최대로 동등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계층화는 정당하지 않다. 계층 피라미드를 보다 평평한 무엇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나라들에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정치적 조정으로 계층의 평등화를 추구한다. 고소득 직군은 그 소득의 상당부분이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경유해 공동체 전체를 위해 쓰이는데 동의한다. 같은 직종에 있다면 그 직종의 임금을 모두 동일하도록, 또 모든 직종의 노동자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기도 하다.
단적으로 스웨덴의 경우 최저임금제가 없고 평균임금제(연대임금제로 번역하기도 한다)가 있다. 매년 전국의 노동자단체들과 자본가단체들이 모여 평균임금수준을 결정한다. 평균임금수준을 감당할 수 없어 도산하는 기업들이 있더라도 국가는 이를 굳이 막지 않는다.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모습 같지만 정반대다.
여기엔, 기업의 경쟁력이 노동자들이 비루한 삶을 견디는 대가인 '저임금'에서 나와선 안 된단 신념이 담겨 있는 거다. 그래서 국가는 경쟁력이 없어 도산하는 기업의 자본가와 노동자들을 전부 껴안는다. 기본소득제, 실업지원 및 창업지원 등의 사회안전망들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다.
이처럼 오로지 기술력을 경쟁무기로 경제구조를 고도화하는 속에서 노동자들의 삶도 안정되게 함으로써, 이들 나라들은 경제발전과 사람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복지는 망국의 지름길'이란 편견을 깨는 이런 시스템에 놀란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그 작동원리를 소개하는 책 제목을 아예 <스웨덴 패러독스>라고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