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환갑 때 번듯한 선물을 드리고 싶어 거금을 들여 제주도 효도 여행 상품권을 샀다. 그러나 아버지는 환갑잔치도, 여행도 싫다고 하셨다. 결국 내가 엄마를 모시고 효도 관광을 떠났다. 효도 관광의 상술에 따라 스물일곱의 나는 재미없고 이상한 제주 여행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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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환갑 때 나는 교직 3년째였다. 번듯한 선물을 드리고 싶어 거금을 들여 제주도 효도 여행 상품권을 샀다. 그러나 아버지는 환갑잔치도, 여행도 싫다고 하셨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좋아야 하는 데 왜 억지로 가게 하냐고 하셨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여행 전날까지도 변함이 없으셨다. 결국 내가 엄마를 모시고 효도 관광을 떠났다. 제주 공항에 내리니 버스에는 모두 어르신들이었다. 효도 관광의 상술에 따라 스물일곱의 나는 재미없고 이상한 제주 여행을 해야 했다.
바닷가 일정이 있는 날, 나는 한라산을 등반하기로 했다. 저녁때 들어보니 어르신들은 그저 가이드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앉아 해수욕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고 했다. 엄마 역시 백사장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한 할머니가 묻더란다.
"따님이 정말 효녀네요. 엄마랑 효도 관광을 오고. 언제 혼자 되셨어요?"
졸지에 엄마는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가 되셨고 나는 효녀가 되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고집 아니 소신대로 사셨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사람들을 볼 때 흔들렸다. 꼭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였다. 해외여행보다 북한산 둘레길 걷는 걸 더 좋아했으면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주기를 먼저 의식했다. 아들인 한빛에게도 진심이 아닌 보이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한빛은 알고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엄마를 많이 이해하려고 했으니까.
한빛은 나에게 백신이었다
아버지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셨다. 허례허식을 싫어하셨다. 제사도 오후 7시에 지냈다. 작은 집식구들과 친척 할머니들이 안전하게 귀가하셔야 하고 아이들도 참여시켜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할머니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셨지만 아버지는 꿋꿋했다.
대신 우리는 제사 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긴 시간 동안 조상들의 역사를 들어야 했다. 대단한 가문의 이야기가 아닌 민담이었는데 매년 들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주말농장에서 잡초를 뽑을 때 어린 한빛이 "엄마, 외할아버지의 할머니. 그 위의 할머니는 배추를 풀인 줄 알고 다 뽑으셨지? 엄마는 배추가 어느 건지 다 알아?"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또 제수를 술 대신 사이다로 하셨다. 투명한 술(정종)과 사이다가 비슷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사이다를 구경도 못 해본 우리들을 위해서였다. 실용적인 면에 방점을 두신 것이다. 우리는 제삿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퇴주잔이 나오면 사이다를 냉큼 받아 마실 수 있어서였다.
한빛도 외갓집 제사에는 꼭 가려고 했다. 엄마가 안 사주는 사이다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서였다. 한빛 한솔까지 절을 시키니 작은 술잔(사이다)은 열다섯 개도 넘었다. 또 제사상에는 페리카나 양념치킨도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긴 이야기로 거품이 다 사라진 사이다를 홀짝홀짝 마시던 한빛. 아무리 그렇게 키워도 한빛 역시 중학생이 되니까 콜라를 기본으로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의 삶에서 보았던 인과관계는 자연스러웠다.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결론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기 위해 산 것 같다. 한빛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빛이 나에게 백신이었듯, 나도 한빛의 백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 한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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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인 나는 그 말을, 웃으며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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