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천 선생 충노비 앞에는 매년 제사를 지내주는지 제단이 마련되어있다.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은 주인을 대신해서 죽은 노비를 위해 비석을 마련해주는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
오창경
정확한 명칭은 한 채는 정려각(旌閭閣)이고 다른 한 채는 비각(碑閣)이라 한다. 이 두 채에는 조선 시대 한 집 안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겪어냈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있었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국가에서 내린 포상으로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거나 포상 내용을 현판에 써서 작은 집을 만들어서 걸어두는 것을 말한다. 그 정려각 안에는 충신 이기지(李器之, 카스텔라 만들기를 처음 시도했던 조선의 선비)와 그 며느리 온양 정씨의 정려 현판이 모셔져 있다.
일암 이기지 선생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 쓴 기사 '
조선의 선비 카스텔라 맛에 반하다 http://omn.kr/1ming'에 자세하게 소개했다. 일암 선생이 살았던 조선은 숙종과 경종, 영조로 이어지던 시대였다. 역사를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세 임금의 시대만큼은 TV 사극과 영화 등으로 빈번하게 드라마화 되었기에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장희빈과 사도세자,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등이 그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들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희비극의 역사 뒤에는 당파 싸움이 있었다. 조선의 역사는 상대가 전멸해야 끝이 나는 제로섬 게임 같은 당파 싸움의 역사였다. 영화 <사도>(2014년 감독 이 준익)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희빈과 사도세자는 왕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지방의 선비들이나 한 가문이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던 스토리는 마을의 비석이나 정려 속에 갇혀 있다.
북경에서 선진 문물을 접하고 꿈에 부풀어서 돌아왔던 일암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휘말리게 된다. 노론에 속했던 일암의 부친 이이명은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 이명은 사약을 받게 되고 일암도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면서 당시 부여의 명문 가였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 백강 이 경여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당시 임금이었던 경종이 소론의 상소를 받아들여 연잉군, 후에 영조임금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을 견제한 결과가 신임사화였다.
이쯤이면 드라마 공화국이라고 일컫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손에 땀을 쥐는 드라마 한 편 정도는 그려질 것이다. 순식간에 역적의 집 안으로 몰려 대가 끊기게 된 위기 속에서 이씨 집안 여인네들 이이명의 처와 며느리는 한 가지 묘안을 짜낸다. 감옥에서 요절한 일암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이봉상과 집안 노비의 아들을 바꿔치자는 계획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