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부부의 무덤.
김종성
이승만은 양자·재산·묘지와 관련해서는 개인적 희망을 드러낸 반면, 정치 복귀와 관련해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처럼 노골적으로 정치적 의지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승만은 귀국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1997년 9월 9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박정희, 62년 이승만 귀국 요청, 김종필 총재 비화 공개'라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62년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의 특명을 받고 하와이에 가서 귀국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건강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화장 사람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사법처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망명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었다. 박 정권이 비호한다 해도 국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신변보호를 철석같이 약속한 박 정권도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4·19 직후의 7·29 제5대 총선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이 민의원(하원) 233석 중 2석 밖에 얻지 못했다는 점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 복귀를 도울 만한 세력뿐 아니라 신변 안전을 보장할 세력도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도로 새누리당으로 복귀했다'는 평가까지 듣는 미래통합당이 있어 그나마 의지할 데가 있는 박근혜와는 처지가 달랐다.
거기다가 이승만은 망명 당시 85세였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박근혜를 훨씬 능가하는 권력의지를 가진 그가 박근혜처럼 대담한 정치적 메시지를 띄우지 못한 데는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언론의 관심을 끈 이승만의 편지는 박근혜 편지처럼 대담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줄 양자를 입적시키고 이화장에 있던 물건들을 원위치시키고 자기를 국군묘지에 묻어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승만의 편지들은 전직 대통령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편지도 박근혜의 편지처럼 세상을 실망시킬 만한 것이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는 시를 쓴 저항시인 김수영은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 아침에 이런 시를 썼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중략)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중 일부.
이승만이 양자를 걱정하고 이화장 재산을 걱정하고 사후의 묘지를 걱정하는 편지들을 고국에 보냈을 때, 시인 김수영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김수영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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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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