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한빛에게 민물고기에 물감을 칠했던 얘기를 했다. 한빛이 크면 이 얘기를 다시 하고 싶었는데 더는 할 수 없게 됐다. 천천히 하나하나 꺼내 얘기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나는 혼자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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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나 나나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시도했다. 그리고 집중했다. 그때마다 돈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절약생활 할 자신도 있고 의미가 있다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비데는 생각을 못 했다. 그 문화에 대해 잘 몰랐다. 지금도 뚱뚱한 나는 매일 비데를 사용하면서 아버지께 죄송하다.
아버지는 고집이 세셨지만 한빛아빠 말처럼 탐욕이 없으셨다. 특히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셨다. 엄마와 돈 문제로 가끔 말다툼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검소하셨기 때문에 엄마도 용서하신 것 같다. 그 가치관이 자식들에게 좋았을까 묻는다면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빛아빠가 해직되었을 때 내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주신 생활태도 덕분이다.
아버지는 묵직하고 실천적이셨다. 국민학교 1학년때 우리 교실에는 주황색 금붕어가 있었다. 갈색의 밋밋한 똥고기(송사리나 버들치)만 보았던 나는 화려한 빨간색 금붕어가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 했다.
어느 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 집으로 가져왔다. 오빠 가방에서 물감을 꺼내 물고기에 색을 칠했다. 그러나 아무리 덧칠해도 물고기는 빨간색으로 물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둘 말라갔다. 대야에 다시 넣으니 모두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둥둥 떴다. 마침 집에 들어온 오빠한테 허락 없이 가방을 뒤졌다고 혼이 났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아버지가 퇴근하셔서 자초지종을 들으셨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고 시장으로 갔다. 당시 수족관이란 말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금붕어를 어항과 함께 그릇 가게에서 팔았다. 꽃 모양의 작은 어항과 금붕어 몇 마리를 사서 물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에 담았다. 조심조심 걸어서였는지, 가슴이 벅차서였는지 나는 허공을 걷는 듯 둥둥 뜬 채 걸었다.
한빛이 어렸을 때 13평 아파트에 큰 수족관을 설치했다. 수족관 앞을 지나려면 몸을 옆으로 돌려야 했지만 일단 저질렀다. 열대어는 생각도 못 했다. 비싸기도 했지만 두 아들에게 민물고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와 함께 개울에서 민물고기를 잡으면, 한빛은 민물고기 책을 펴놓고 물고기 이름을 찾았다.
책이 물에 젖었다 말랐다 해서 너덜너덜했지만 어린 한빛은 책을 제일 먼저 챙겼다.
아이들이 다 그렇지만 한빛도 물고기를 참 좋아했다. 한빛이 아침마다 의자에 올라가 물고기 밥을 주면 한솔이가 뒤뚱뒤뚱 따라 나와 수족관에 까치발로 매달려 "꼬기, 꼬기"하며 물고기들을 불렀다. 수족관 앞에서 물고기 이름을 가르쳐주는 형과 신나하는 동생, 이제는 다 눈물겨운 추억이 되었다. 다시 얘기할 수 없는 '과거 완료형'이 된 것이다.
그때 한빛에게 민물고기에 물감을 칠했던 얘기를 했다. 한빛이 크면 이 얘기를 다시 하고 싶었는데 더는 할 수 없게 됐다. 천천히 하나하나 꺼내 얘기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나는 혼자 말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에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