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뜻하게 품어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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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뜻하게 품어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1989년 1월에 한빛이 태어나고 한빛 아빠는 8월에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다. 이후 그는 5년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다. 아버지는 한빛 아빠가 해직되기까지의 일련의 상황을 예측하고 계신 듯했다. 딱 한 번 4.19 때 교원노조 경험을 말씀하시며 전교조 설립과정이 어려울 거라고 하셨다.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한빛아빠가 제 뜻을 결연하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이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바라셨을 것이다. 교육 개혁을 위해서 노조 설립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내 사위만은 그 속에 엮이지 않기를. 딸의 앞날이 어떨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게 옳은 길이기에 아무 말씀도 못 하고 속으로만 삭이셨다.
갑작스러운 한빛 아빠의 해직으로 한빛을 키워주시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기죽지 않게 엄청 신경 쓰셨다. "시간은 많은데 할 일이 없다"며 매주 금요일 한빛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포천에서 의정부까지 경로우대라며 무료 완행버스를 타고 오셨다. 나는 싫었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채 금방이라도 가다가 멈출 것 같은 완행버스가 싫었다. 진한 매연을 뚫고 내리는 노인네와 어린 손자의 모습도 싫었다. 내 자격지심 때문에 창피해 스스로 불쌍했던 것 같다.
육아비는커녕 차비도 못 드리면서 아버지 연금 타령만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좋아서 한다. 한빛이도 천천히 가는 버스 덕분에 바깥 구경도 많이 할 수 있고 자연 공부가 저절로 된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차비를 안 썼네 하시며 한빛 손에 항상 만원 지폐 한 장을 쥐여 주셨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를 살리셨다. 덕분에 우리는 그 돈으로 매주 한 번씩 소고기 등심 로스구이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쪼들릴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아셨지만 아버지는 생활비를 보태주시거나 목돈을 주지 않으셨다. 일체 말씀을 안 하셨다. 고마웠다.
한빛을 하늘로 보내고 난 후 아버지가 한빛을 키우면서 애끓었을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버지한테 불효해서 한빛을 잃었나?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아버지,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가르쳐 주세요"하며 가슴이 찢어지도록 울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버지가 강조하셨던 스스로 찾으라는 건가?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가 두렵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
①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한 손자,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http://omn.kr/1lu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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