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스스로 자신 몫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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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이블러가 되는 원인
앤절린 밀러는 사람들이 '인에이블러'가 되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한다. 하나는 바로 낮은 자존감이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는 이들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에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다. 이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괴로워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이들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랐다. 내 자존감은 거기에 달려 있었다." (78쪽)
하지만, 인에이블러에게는 도움을 주는 일이 끝났을 때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 때문에 인에이블러들이 주는 도움은 상대방을 성장시키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문제를 유지하거나 조장하도록 한다. 이런 인에이블러들의 성향은 누군가에게 의존해 사랑받음을 확인하고픈 '의존자'들의 성향과 딱 맞물린다. 이 때문에 '인에이블러- 의존자' 관계는 공고히 유지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가 인에이블러 되기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은 남의 기분을 맞춰줄 때 칭찬을 받아왔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갈 사회적 경제적 힘을 갖추지 못해왔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고,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됨으로써 존재를 증명해왔던 것이다.
"어머니와 내 자매들, 그리고 내 딸과 나는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서 좌절을 경험했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결정을 내릴 때에도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남자들에게 종종 물어보아야 했다. 몇백 년에 걸쳐 여자들은 직접적인 힘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슬리거나 교묘하게 조작하거나 은밀히 보상을 주고 벌을 주는 등 온갖 '막후'수단에 의지해왔다." (146-147쪽)
"사회 또한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인에이블러가 되도록 조금씩 몰아갔다. 몇 천 가지 미묘한 신호를 보내면서 여자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역할은 내게 잘 맞았다."(77쪽)
자기 몫의 행복을 책임지는 삶
앤절린 밀러의 자전적 이야기와 분석은 아내와 엄마로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주말 동안 집을 비우는 것을 그토록 망설였던 것이 남편과 아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인에이블러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남편과 아들이 흔쾌히 서울서 1박을 해도 된다고 말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나는 남편과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함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나 역시 '인에이블러'였음이 분명했다.
이를 깨달은 후 나는 책의 후반부에 정리된 인에이블러에서 벗어나는 법을 마음에 새겼다. 저자는 시간을 들여 자신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하든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며, 변화를 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겁을 먹지 말라고 조언했다. 또한, 가족 바깥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개인의 정체감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적었다. 이 조언에 따라 나는 내가 관심 있는 주제의 집단상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주말에 집을 비우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물론, 서울서 1박을 하며 친구도 만나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집단상담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오래된 친구와 보낸 그 시간은 내게 더없는 힐링이 되어주었다. 가족들도 나름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등산을 싫어하는 나와 함께 가지 못하는 어려운 등산코스에 아들과 함께 도전해 성공했다며 뿌듯해했다. 아들 역시 엄마없이 하룻밤을 보낸 자기 자신을 대견해했다.
앤절린 밀러는 딸 니나와 함께 상담가를 찾았을 때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상담자가 나를 쳐다보다니 물었다.
"딸의 행복이 당신 책임인가요?" 나는 대답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상담가는 니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엄마의 의무라고 생각하니?"
니나는 "물로 아니죠"라고 대답했다. (93-94쪽)
우리 중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책임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책임진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남편이고 딸이고 아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자기 몫의 행복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 나 역시 나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건 1988년이다.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여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인에이블러의 고백
앤절린 밀러 (지은이), 이미애 (옮긴이),
윌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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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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