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야인 시절이던 지난 2008년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 를 방문해 마을 원로들부터 제주4.3의 비극에 대해 얘기를 듣는 장면이다.
장태욱
10여 년 전 시민기자로 제주 구석을 누비던 시절이 있다. 매주 제주의 마을 한 곳을 정해서 사람을 만나고, 마을 구석에 남은 삶의 자취를 찾으려 했다.
제주의 마을에는 공통적으로 빠질 수 없는 슬픔이 있다. 한국전쟁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뼈아픈 역사인 제주4·3에 관한 것이다. 제주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 사라져버린 마을들,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들, 비극을 수집하며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가슴엔 슬픔이 켜켜이 쌓였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한 덕에 꽤 많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게 됐다. 도내 연구자들과도 신뢰가 쌓였고, 4·3평화재단에서 근무하는 직원과도 가까워졌다. 외국에서 온 석학을 안내한 적도 있고, 아랍을 대표하는 방송인 '알 자지라'의 취재진을 만나 현장을 소개한 적도 있다. 취재기자가 아닌 아마추어 언론인으로는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도민의 상처를 어루만지겠다"던 그였는데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 가운데 지금은 집권여당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해찬 의원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하던 2008년 여름, 지금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원철 의원(내겐 그냥 '형'이다)을 통해 연락이 왔다. 박원철 의원은 "이해찬 (전) 총리께서 네 4·3관련 기사를 보고 한 번 만나고 싶어 하신다"라고 했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됐다. 이해찬 대표는 당시 "요즘은 정치를 안 하니까 시간이 남아서 도종환 선생과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눈다"라며 "내가 제주도와 4·3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하자 도종환 선생이 시나리오 써주겠다며 다큐멘터리를 한 편 제작해보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기사 가운데 표선면 토산1리 다룬 글을 언급했다. '다른 곳으로 물질을 다녀왔더니 남동생들이 다 죽고 없었다'던 해녀의 얘기가 인상에 남았다고 했다.
이해찬 대표의 일행과 표선면 가시리를 먼저 찾았다. 오임종 표선면 4·3유족회장과 안봉수 가시리장이 함께 했고 마을 원로들이 4·3 당시의 비극을 증언했다. 학살터에 부모와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경험담, 경찰이 아기를 안고 있는 아주머니를 강제로 끌고 와서 총살하는데 아기만은 살리고자 죽을 때까지 아기를 품는 엄마를 봤다는 목격담, 부모 없이 홀로 자라는데 학교에 가서도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후일담 등 원로들은 그동안 가슴에 품었던 얘기를 꺼내며 울분과 서러움을 터트렸다.
원로들은 "나라의 총리까지 지내신 분이 우리 마을까지 찾아와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시니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올렸고, 이해찬 대표는 "참여정부가 제주도민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도민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화가 끝나고 이해찬 총리는 "오늘 내가 오길 잘했다. 어른들이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솔직히 쏟아낼 정도로 우리 참여정부에 신뢰를 갖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가서 좋은 자료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가시리 마을 다음으로 토산1리를 찾았다. 토산1리도 상황을 가시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3당시 남자 대부분이 몰살돼 여자들만 남은 마을이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취재가 끝났고,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데 기다렸던 다큐멘터리는 나오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당시 가시리나 토산1리 원로들이 쏟아낸 절박한 울분과 서러움을 이해찬 총리가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노인들의 언어가 제주어 원형에 가까워 이해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분들의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게다. 또, 이듬해 예기치 않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