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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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반도 국가로서 예로부터 외적의 수많은 침입을 받아왔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주로 중국과 일본이 대부분이었지만, 19세기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서양세력들도 침투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를 탄압하는 등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문호를 개방하라고 요구하는 서양과 배척하는 조선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져갔고, 결국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크게 번지고 말았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시기는 차이가 나지만 '강화도'에서 벌어졌다는 유사점이 있다. 왜 외세들은 '강화도'에 주목했을까.
강화도는 지형적으로 인천, 서울과 가까우며 한강에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하는 섬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오로지 배로만 진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강화도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는 수도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도 강화도에는 두 양요 특히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격전지들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과 사적 제227호 '강화 광성보'가 대표적인 유적지다.
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은 고려시대부터 강화도를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기록되어 있다.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의 군대가 거쳐 간 곳이었으며,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하게 포격전을 벌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미국군대가 점령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파괴됐다. 1976년 성곽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으며, 돈대(소규모 군사 기지), 누각, 대포 등도 복원돼 현재의 모습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