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생성 하시모토 부대신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 "현장은 이런 느낌. 이미지에서 글자를 읽기 어렵지만 왼쪽이 '청결 통로', 오른쪽이 '불결 통로'입니다" 라고 적으며 사진을 첨부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크루즈 내의 허술한 공간 격리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진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사진은 삭제됐다. 위 사진의 출처는 이와타 켄타로 교수의 트위터.
트위터 캡처
'코로나 섬', '감염병의 핫스팟'이라는 오명이 말해주듯 크루즈 내부 상황이 비참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 누구보다 크루즈 내부의 상황을 잘 체감했을 일본 크루즈 승객들의 모임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선내 격리 생활자 지원 긴급 네트워크'가 지난 11일 일본 후생성을 상대로 낸 요청서에 따르면 "병 징후가 나타난 승객을 방치하고 그들의 요청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들이 발생했으며 그 모습이 "흡사 야전병원"과 같았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주도한 선내 격리 대책으로 인해 감염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감염의 폭발적인 확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호소하기도 했다. 이 요청이 있었던 것은 2월 17일, 일본 크루즈의 봉쇄가 시작된 것이 2월 3일부터인 것을 감안하면 무려 2주 동안이나 내부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무책임, 방치가 지속된다면 통제를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자신들을 포기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통제 당하는 지역도 결국은 치료되고 회복되는 여정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주 폭력적인 대처
현재와 같이 감염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는 시점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발상'이나 '공공을 위한 통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생각은 추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주의는 전체주의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적 발상이란 말 할만한 것은 무엇인가? 현대 일본 최후의 사상가로 불리는 후지타 쇼조는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송두리째 없애 버리려는 동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이야기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란 불쾌함을 피하려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불쾌함이 존재하는 원천 자체를 부정하는, 절멸적이고 폭력적인 감정이다. 이를테면 나와 사이가 나쁜 직장 동료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나와 직장동료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과 갈등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사이가 나쁜 직장 동료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일본 크루즈 사태에서도 이 같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나 감정이 일부 존재했었다고 본다. 몇몇 일본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을 중심으로 점검해 보자.
먼저, 아래는 지난 18일 있었던 일본 후생성 장관의 기자회견 내용의 일부이다. 이날 가토 가쓰노부 후생성 장관은 3700명에 달하는 사람을 크루즈 내에 고립시킨 조치가 적절했는지를 묻는 일본 기자의 물음에 이와 같이 답했다.
"(사람들을) 가둬 놓은 것이 아닙니다. 검역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국내 상륙에 대해 필요한 수속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답변은 일본 정부가 크루즈 내에 타고 있는 자국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크루즈 문제의 본질은 제쳐두고 승객을 '가두거나 유치(留置)'한다는 뜻의 표현 '留め置い'의 활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관의 모습에는 2주간 선상에서 일신을 구속 당한 국민에 대한 배려와 미안함 따윈 없다.
통제를 당한 사람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통제를 가한 정부당국의 입장에서의 서술인 것이다. 그토록 우악스러웠던 통제정책이 오직 입국을 위한 검역 절차였을 뿐이고 또 '그것이 전부'라는 발언에서는 크루즈 내 승객들이 겪었던 두려움과 불편함 등을 외면하는 듯한 태도가 비친다.
크루즈 사태를 다소 모멸적으로 비유한 인사도 있었다. 지난 20일 일본의 전 관방장관이자 자민당 유력 정치인인 호소다 히로유키는 자민당 내 정파 모임(호소다 파)에서 참석, "부담스러운 흰색 배(大變な白船)가 왔다"며 일본 크루즈 사태를 평가했다.
여기서 '흰색 배(大變な白船)'란 19세기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했던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에 대칭시킨 표현이다. 즉, 크루즈를 폭력적 개항의 상징인 페리 제독의 '흑선'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이다. 일본 크루즈에 타고 있는 승객과 승무원들이 졸지에 일본을 위협하는 적으로 둔갑시키는 발언이었다.
일본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순응했던 크루즈 승객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비유일 수밖에 없다. 아니, 3700명의 탑승객 중 외국인은 차치하고서라도 1281명에 달하는 일본 국민은 어째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이후 호소다 히로유키는 이 발언의 저의를 추궁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크루즈 사태가 의외"였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이 또한 일본 정계 특유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잘 보여준 발언이었다.
통제와 동시에 '희망'도 제공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