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현 무소속 예비후보(왼쪽), 조혜민 정의당 여성본부 본부장(오른쪽).
김예지
"언제까지 기자회견만 해야 하나. 여성운동을 할 때는 국회 밖에서 외쳤고, 이제는 정당의 여성들이 국회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볼륨'이 작다. 이번 기회야말로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적기다. 많은 이들이 21대 총선을 '촛불 이후'의 총선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나에겐 '미투 이후'의 총선이다." (조혜민 정의당 여성본부 본부장)
2016년 말, 연인원 10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부패한 정권을 끌어냈다. 누군가는 촛불혁명 이후를 정권 교체와 적폐 청산의 시기로 요약한다. 하지만 함께 광장에 섰던 여성들에게 지난 3년은 '미완의 시간'이었다.
미투 운동, 혜화역 불법촬영 반대 시위, 디지털 성폭력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지만 정부와 국회의 응답은 미온적이었다. 비동의 간음죄 신설, 스토킹 처벌법 제정, 낙태죄 개정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21대 국회에 들어가 "정치의 코르셋을 걷어내"고 "이기는 페미니즘"을 하겠다고 외치는 '90년대생 페미니스트들'의 등장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운동이 이뤄내고자 하는 의제를 실현하는 공간은 정치다. 그게 안 되니까 좌절하고 떠나는 거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여성들의 요구가 높아졌을 때 국회에서 제도적으로 실현해내야 한다.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정치인 필요하다." (이가현 무소속 예비후보)
19일 오후, 서울시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21대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조혜민 정의당 여성본부 본부장(29)과 이가현 무소속 예비후보(28)를 만났다. 조혜민 본부장은 오는 3월 치러지는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경선을 앞두고 있다. 이가현 예비후보는 이미 동대문구갑 무소속 출마 의사를 밝히고 선거 레이스를 시작했다.
조혜민 본부장과 이가현 예비후보는 모두 명함에 '페미니스트'라는 문구를 새겼다. "'어린 여자가 무슨 정치냐'고 묻는 세상에, '어린 여자니까 정치하는 거지 뭐'"라고 되받아치는" 의미다.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질 적기라고 강조한다. 어떤 경험이 90년대생 페미니스트들을 정치로 이끌었을까.
메갈리아, 강남역, 미투... 답은 '정치'일 수밖에 없었다
조혜민 본부장과 이가현 예비후보는 모두 정치에 뛰어들기 전 여성운동의 현장을 경험했다. 대학 때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았던 조혜민 본부장은 학내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했다. 당시만 해도 성평등 관점이 보편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10개가 넘는 단과대 중 단 두 곳을 제외하면 학생회장은 모두 남성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성추행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학교는 가해 학생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았고, 법적으로도 벌금형에 그쳤다.
그 후, "절대 여성운동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겠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여성운동에 대한 고민을 놓긴 힘들었다. 2012년 정의당 창당 직후 입당해 당직자로 일하면서 성소수자위원회 등을 맡다가, 1년 뒤 훌쩍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여성학. 그에게 다시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건, 결국 '미투 운동'이었다.
"'내가 결국 이 길로 가는구나' 싶었다. 무서웠다. 많은 것을 알았을 때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여성학과에 들어가 안전한 사람들과 공간을 만나면서 대학 때 겪었던 일들에 대한 자책을 덜게 됐다. 미투 운동을 만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나도 여성운동을 할 수 있겠다,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가현 예비후보는 대학생 시절 '알바노조' 등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한창 '최저임금 1만 원' 구호가 등장하던 시점이었다. 그에게 노동은 중요한 의제였지만,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운동가들의 반감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틀린 건가'라는 혼란스러웠다.
막연히 불편하다고 느끼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해준 건 2015년 태동한 여성 커뮤니티 '메갈리아'였다. 남성들의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운동판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똑같은 활동가였지만 남성은 늘 대표 역할을 맡고, 여성은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도 결국 남자 판이었구나 싶었다".
그 다음 해(2016) 강남역 살인 사건이 터졌다. 자신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후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을 직접 만들고, 꾸밈 노동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던 페이스북 본사 앞 '상의 탈의 시위'도 이때 나왔다. 하지만 대중과 언론의 주목은 찰나였다. 거리에서의 외침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어릴 적 꿈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대통령 되고 싶었다. 국회에서 싸우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경멸했던 기억이 있다. '싸움장이 아닌데 왜 저러지,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정치인'으로 적곤 했다. 그런데 사회로 나와서 성차별이나 성폭력을 경험하면서 '나는 할 수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자'는 정도로 저의 위치를 잡았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다시 그 꿈들이 떠오르더라. '어린 이가현은 대통령 되고 싶어했는데, 지금의 나는 왜 못한다고 생각할까'."
이후 이가현 예비후보는 아시아 최초 페미니스트 정당 '페미당' 창당 모임을 주도했다. 창당을 위해선 5개의 시·도당을 만들고 최소 5000명 이상의 법정 당원을 모아야 했지만, 21대 총선을 앞두고 목표를 이루긴 쉽지 않았다. 결국, 페미당 창당에 손을 떼고 지난 1월 동대문갑 무소속 출마 의사를 밝혔다.
"동대문구는 내가 20여 년간 살아온 곳이다. 이 동네가 '페미니스트 이가현'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동대문구갑은 한국여성의전화 초대 원장을 지낸 김희선 전 의원이 재선한 곳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기호 1번 김희선 후보의 포스터 붙어 있었다. 그런 삶의 장면들이 저의 미래를 구성하는 데 힘을 줬다고 생각한다. 인근 지역구인 동대문구을에선 2001년 김숙이 후보가 '한판 붙자, 남자 세상'이란 슬로건으로 출마한 적이 있다. 동대문구는 여성 정치인의 여성주의적 시도들이 계속 있던 곳이고, 나는 그 토대에서 자랐다. 이 역사를 잇기 위해 나같은 사람이 필요하다."